당신의 존재는 이미 아름답다
9화.
무지
얼마 전, 저는 가족과 함께 북한산을 올랐습니다.
가을바람은 조금 차갑게 불어와 목덜미를 서늘하게 스치고, 길가의 낙엽 사이로 햇빛은 얇게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늘 그렇듯 쉽고 평탄한 코스를 걸을 계획이었지만, 그날만큼은 이상하게 오른쪽으로 난 초행길이 제 마음을 끌었습니다.
가벼운 산책을 떠나는 기분으로 걸음을 옮겼지만,
곧 그 길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우리를 이끌기 시작했습니다.
흙길은 어느새 사라지고, 바위가 층층이 겹쳐진 가파른 경사가 나타났습니다.
배낭을 메지 않았기에 물과 간식을 하나씩 손에 들고 있었는데, 반쯤 비어 있는 생수병은 걸을 때마다 속에서 물이 출렁이며 작은 빈 공간을 흔들어댔습니다.
아이의 주머니에서는 초코바의 비닐이 바스락, 바스락 조그맣게 울렸고, 그 소리가 바위틈으로 길게 퍼져 나갔습니다.
정상은 바로 앞에 있는 듯 보였지만, 가까워질수록 더 멀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손끝으로 바위의 틈을 더듬어야 했고, 발끝으로 균형을 잡으며 올라가야만 겨우 한 뼘씩 전진할 수 있는 암벽 같은 길이 계속되었습니다.
저는 제 몸이 버티는 것조차 힘든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하물며 아이와 아내는 더 힘들어했습니다.
한번 시작하면 끝을 봐야 하는 성격이라 마음을 다잡고 버티며 암벽 산행을 계속했습니다.
그렇게 힘겨운 암벽 구간을 지나 평지로 내려서는 순간,
저는 오래 잊고 있던 어떤 고마움이 갑자기 온몸으로 스며드는 것을 느꼈습니다.
“만약 세상이 전부 이런 암벽으로 이루어져 있다면,
우리는 얼마나 고단한 삶을 살아야 했을까.”
평지는 언제나 거기 있었지만
한 번도 감사해 본 적 없는 ‘은혜의 자리’였습니다.
그 단순한 단단함을 저는 처음으로
뼛속 깊이 체감하고 있었습니다.
하산길,
그 깨달음을 아들에게 나누자 아들은 잠시 생각하더니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빠, 공기도 그런 거잖아.
숨 쉴 때는 아무렇지 않은데
바닷물이나 수영장 물이 코에 들어가면
숨조차 못 쉬잖아. 그리고 엄청 매워!
그때야 공기가 얼마나 좋은지 알지.”
그 말을 듣는 순간,
저는 이상할 정도로 마음 깊은 곳이 크게 흔들렸습니다.
평지의 고마움, 공기의 감사함…
그 모든 단순한 진리가 아이의 한 문장을 통해
가슴속에서 갑자기 결을 드러내며 빛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 결은 자연스럽게 부모님의 사랑으로 이어졌습니다.
평지처럼, 공기처럼,
너무 가까이 있어서 보이지 않았던 사랑.
늘 저의 옆과 등 뒤와 발밑에서 조용히 저를 받쳐주던 마음.
단단한 대지처럼 흔들림 없이 이어져 왔지만, 제가 너무 무지해서 느끼지 못했던 그 사랑이 그날 산의 공기 속에서 뒤늦게 제게 다가왔습니다.
그 자리에서 저는 다음의 시를 적었습니다.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손끝이 저리도록 암벽을 오르고 나서야
평지의 고마움을 알 듯,
바다에 빠져 소금물을 코끝까지 들이키고 나서야 공기의 소중함을 알 듯,
자식을 향한 부모의 마음은
언제나 걱정과 사랑으로 가득 차 넘쳐흐르지만,
자식들은 무지하여 느끼지 못한다.
그 숭고한 사랑을…
두 분을 멀리 떠나보내고 나서야만
부모님의 사랑을 알아간다.”
시집 <당신의 존재는 이미 아름답다> 중에서...
이 시는 단순히 부모님이 떠오른 순간을 적은 것이 아니라, 제가 평생 무지 속에서 지나쳐 온
‘보이지 않는 존재들의 구조’를 깨달은 기록이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또 하나의 진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부모님의 사랑은 단 한 번도 자신을 드러내고자 하지 않았다는 것.
큰 몸짓으로 알려오지 않았고, 어필하거나 강조한 적도 없었습니다.
늘 평지처럼,
공기처럼,
하늘처럼
저를 조용히 감싸고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그 깨달음은 곧 제 아이를 바라보는 눈으로 이어졌습니다.
나는 부모님께 받은 이 조용한 사랑 위에서 자라왔고,
이제 그 사랑을 다시 아이에게 건네야 하는 사람이라는 사실.
부모로서의 제 역할도 크게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자리에서 지켜주는 것임을 그날 저는 뼛속 깊이 배웠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제 삶을 떠받쳐 온 존재들이 갑자기 수억 개의 빛점처럼
하나씩 제 마음속에 떠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위로해 준 말 한 줄,
지나가며 건네준 작은 친절,
누군가의 기다림, 이해, 간식 하나,
사주시면서 주머니에 넣어주시던 마음, 저를 믿어주던 시선…
제가 무지한 채 지나쳐 온 수많은 은혜들이
이제야 비로소 한 겹씩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글을 읽는 독자 여러분께
조심스럽게 이 마음 하나를 남기고 싶습니다.
여러분도 오늘 하루만큼은
여러분 곁에 있지만 익숙해서 보지 못했던
수억 개의 감사의 존재들에게 살짝 눈을 돌려 보시길 바랍니다.
평지처럼 조용하고,
공기처럼 말없이 존재해 온
누군가의 사랑이
그 순간,
조용히 여러분 앞에 모습을 드러낼지도 모릅니다.
감사는 늘 조용히 다가오지만,
우리를 가장 멀리 이끄는 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