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거울

당신의 모든 순간을 보고 있다

by 영업의신조이

7장,

“거울 속 두 사람 — ‘우리’라는 이름의 자각”


지훈은 여전히 어제의 빗속을 걷고 있었다.

젖은 셔츠 너머로 드러났던 윤서의 어깨선, 비에 젖은 머리카락이 뺨에 붙어 있던 그 순간의 정적, 그리고 짧지만 확실했던 살갗의 닿음.


무심히 보낸 우산 안의 거리였지만,

그 미묘한 몇 센티를 허물고 나자, 그녀는 자신의 체온 안으로 스며들었다.


그날 이후로,

지훈의 시선은 어떤 풍경을 마주하든, 자꾸만 그녀의 실루엣을 따라 그의 시선을 떠돌기만 했다. 빛을 받던 그녀의 감촉, 물기를 머금은 촉촉한 눈동자, 그 모든 장면이 그의 가슴 안 어딘가에 아직 말라붙지 않은 채 남아 있었다.


윤서 역시 마찬가지였다.

지훈의 왼쪽 어깨가 비에 흠뻑 젖는 것을 보면서, 자신이 유지하던 그 좁지만 따스했던 거리의 의미를 처음으로 후회했었다. 그 짧은 망설임을 넘어섰을 때, 그녀는 처음으로 누군가의 체온에 스스로 다가간 사람이 되었다.


그 순간의 떨림이 아직 손끝에 남아 있었다.



그날 이후,

지훈은 미술관 측의 요청으로 신규 건축 사업 작업을 위한 사전답사를 하게 됐다. 이 공간은 리노베이션을 앞둔 프로젝트 현장이었다. 건축가로서 공간을 분석하고, 향후 구조와 조도의 흐름을 구상해야 하는 중요한 일정. 그러나 미술관 입구에 붙어 있던 포스터가 그의 걸음을 멈추게 했다.


“클림트 탄생 150주년 특별전”


순간, 떠올랐다.

황금빛 테두리 안에서, 검은색과 붉은 선들이 서로의 몸을 감싸 안던 ‘키스’.


그 화폭이 어쩐지,

비에 젖은 윤서의 모습과 겹쳐졌다.


그녀와 닮은 색감,

그녀가 떠오르는 장면. 지훈은 그렇게 다시, 그녀를 따라 미술관 안으로 들어서게 됐다.



혜진이가 윤서에게 말했다.

“그 사람, 미술관 프로젝트 맡았다더라. 네가 전시를 보고 싶다면... 뭐, 우연도 인연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그 말에 그녀는 조용히 웃었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은 흔들렸다.


클림트.

윤서가 그를 좋아하는 이유는 단지 색감 때문만은 아니었다. 욕망과 고요, 분리와 연결. 그 감정이 늘 복잡하게 얽혀 있는 그의 그림 속에는 지금 자신의 마음과 닮은 것이 있었다.


윤서는 그렇게 전시장을 찾았다.



미술관 내부는 침묵이 깊었다.

조용한 클래식 음악이 바닥에 낮게 깔려 있었고, 천장에서 떨어지는 따뜻한 간접 조명이 작품과 관람객 사이의 거리를 부드럽게 덮고 있었다.


공기는 약간 건조했고,

희미하게 나무 향과 오래된 종이 냄새가 섞여 있었다.

공간은 말없이 감정을 키우는 온실 같았다.


전시장 안쪽,

‘생명과 황금’ 섹션의 유리 벽에

지훈이 먼저 서 있었고, 다른 쪽 입구로 들어온 윤서가 그를 발견했다.


그러나 먼저 다가간 건 눈동자였다.

거울처럼 반사된 유리 위에, 두 사람은 마치, 하나의 캔버스 안에 담긴 피사체처럼 겹쳐진 모습으로 존재하고 있었다.


그 순간,

윤서의 시선이 벽면 중앙의 작품에 닿았다.

클림트의 대표작 ‘연인’

황금빛 섬광 속에 감겨 있는 두 인물 중, 남자의 굵은 팔과 넓은 어깨, 상대를 안고 있는 든든한 몸의 라인이

윤서의 눈을 멈추게 했다.


그 황금빛 체형이,

갑작스레 그녀의 기억 속 어느 장면과 포개졌다. 젖은 셔츠 아래 드러났던 지훈의 전완근, 물기 어린 어깨선과 넓은 가슴, 그리고 셔츠 깃 사이로 드러나던 목선의 곡선까지, 그날 빗속에서 숨죽이며 몰래 훔쳐보았던 그 남자의 모습이 캔버스 안 황금빛 실루엣과 하나로 겹쳐졌다.


가슴이 요동쳤다.

말도 없이 가슴 안쪽을 두드리는 설렘이, 그녀를 무장해제 시켰다. 감정은 예고 없이 올라왔고, 그 순간 윤서는 다시 한번, 그에게 닿고 싶어졌다.


지훈은 말없이 고개를 돌렸다.

윤서도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비로소 그들의 시선은 피하지 않고 머물기 시작했다.


황금색 조명이 둘을 감싸고 있었다.

클림트의 화폭처럼, 빛과 어둠이 뒤섞인 그들 사이에는

말 없는 감정의 붓질이 이어지고 있었다.


“이 공간, 나중에 특별하게 다시 바뀔 거예요.”

지훈이 낮게 말했다.


윤서는 살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바뀌기 전에…

이 순간을 눈으로 그려두고 싶어 졌어요.”


그리고 그 순간,

거울 속 두 사람은 더 이상 낯선 두 사람이 아니었다.

그들은 서로의 시간과 감정을 반사하며 하나의 예술이 되었다,


하나의 운명,

그리고 하나의 이름으로 묶이기 시작했다.

우리......라는 한 폭의 그림이 되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거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