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모든 순간을 보고 있다
8장.
청혼의 순간 — 미래를 건네는 손
지훈은 일에 몰두할수록 더욱 단단해지는 사람이었다. 그의 삶은 도면 위에서 자라고, 손끝의 노동으로 구조를 이루었다. 일터의 열기 속에서 그는 자신을 다스렸고, 윤서에 대한 감정은 그의 깊은 곳에서 조용히 무르익었다.
그러나
그 깊은 열정은 때로 윤서에게 멀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녀는 그를 향해 걷고 싶었지만, 그의 리듬에 불쑥 다가서면 집중을 깨뜨릴까 두려웠다. 그래서 스스로를 조용히 숨겼고, 보고 싶단 말도 삼켜야만 했다.
그런 날들이 이어지던 어느 날,
지훈이 조용히 말했다. "같이 일할래? 미술관, 리노베이션 현장, 나랑 같이 나가 볼래?" 그 말은 단순한 초대가 아니었다. 그것은 두 사람의 시간에 스며든 하나의 문이었다.
그렇게 그들은 함께,
리노베이션이 한창인 미술관에서 연애를 시작했다. 낮에는 각자의 일에 몰두했고, 사람의 기척이 없는 새벽과 늦은 밤, 둘만의 시간이 펼쳐졌다. 윤서는 새벽녘 미술관 옆 공원을 함께 걷는 것을 좋아했다. 이슬 내린 흙내음과 아직 덜 깬 공기의 선선함, 지훈의 손에서 전해오는 테이크아웃 커피의 미지근한 온기. 이 모든 것이 조용한 사랑의 장면이었다.
점심 무렵,
미술관 옆 벤치에서 두 사람은 도시락을 나눠 먹었다. 윤서는 매일 정성껏 반찬을 준비했고, 지훈은 고맙다는 말 없이도 꾸준히 다 먹었다. 어느 날, 땀으로 젖은 작업복을 입은 지훈이 다가왔을 때 윤서는 그의 볼에 붙은 밥풀을 젓가락으로 조심히 떼어냈다. 그 작은 손짓 안에 담긴 애정은 뜨거운 여름 햇살보다 더 진했다. 지훈은 무심한 척했지만, 그 순간의 눈빛은 그 누구보다 다정했다.
그러던 어느 날,
윤서는 지훈이 계속해서 스케치북에 무언가를 그리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항상 그녀와 마주 앉은 채 선을 그었고, 그 선들이 반복되어 가는 과정을 윤서는 눈치채고 있었다. 이마, 눈매, 콧등, 광대, 턱선, 목선, 어깨선까지, 그의 손은 윤서를 닮은 어떤 선을 끝없이 되새기고 있었다. 어느 날 윤서가 조용히 말했다.
"계속 나를 그리고 있는 거, 알고 있었어. 그런데... 그 시간에도 나랑 얘기하고 싶진 않아?"
지훈은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어. 널 내 공간 속에, 내 구조 속에 새기고 싶어."
윤서는 지훈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채 다 먹은 도시락을 포갰다. 그 말은 쉽게 이해되지 않았지만,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 없는 지훈의 사랑 표현이었고 그의 진심이었다. 하지만 윤서는 마음은 시원치 않았다.
리노베이션의 끝이 다가오고,
미술관의 개관일이 열렸다. 햇살 가득한 그날, 미술관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윤서는 조용히 전시실을 걸었다. 입구 한쪽에는 클림트의 대형 포스터가 걸려 있었고, 지훈은 그 앞에 멈춰 섰다. 황금빛 실루엣 속 여인의 얼굴이 오늘따라 왠지 더 윤서와 닮아 있었다.
전시장을 지나
중앙 홀로 들어선 윤서는 빛과 곡선이 교차하는 어느 벽 앞에 멈춰 섰다. 그곳엔 특별한 구조물이 하나 세워져 있었다. 자연광을 부드럽게 반사하며 곡선 형태로 흐르는 그 구조물은 마치 윤서의 옆모습과 같았다. 이마, 콧대, 턱선, 그리고 어깨까지, 그 라인은 분명 그녀 자신이었다. 윤서는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 서 있었고, 눈가가 천천히 젖어들었다.
그 순간,
뒤에서 다가온 지훈이 무릎을 꿇었다. 양복 안주머니에서 작은 반지 케이스를 꺼내며 조용히 속삭였다.
"이건 너야. 여긴 너고, 이 공간은 너를 위해 설계된 거야. 나는 너를 내 삶에 새기고 싶었어. 나와, 함께 해줄래?"
조용하던 전시장에 따뜻한 박수가 울려 퍼졌다.
그것은 의례적인 박수가 아니었다. 사랑을 목격한 이들이 보낸 하나의 동의, 그리고 축복이었다. 윤서는 눈물을 삼키며 고개를 얌전히 끄덕였다.
그날,
미술관은 단지 공간을 여는 날이 아니었다.
하나의 사랑이,
삶 속에 깊이 새겨진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