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07
포도나무 등걸 위로 봄비가 내린다. 온갖 푸성귀가 단비를 맞아 파릇파릇 윤기가 도는 옥상정원이다. 그 모퉁이에 인골처럼 널부러져 비를 맞고 있는 포도나무 등걸이 팔뚝만한 것에서부터 무릎뼈가 툭 불거져 나온 것도 있다.
어떤 것은 구부정한 모양세가 영락없이 엑스레이에 찍힌 내 척추뼈를 닮았다. 잔가지들이 흠뻑 물기를 머금고 진한 갈색의 목피를 밀치며 빼꼼이 잎눈을 뜰 것만 같아 마음이 아프다.
처음 옥상에 장독대를 올렸을 때의 기대와는 달리 예상하지 못한 일이 발생했다. 정성들여 담근 된장이 숙성될 사이도 없이 졸아 들고 간장도 장석이 돼버렸다. 그늘 하나 없는 한여름 땡볕의 슬러브 지붕은 화덕처럼 열기가 달아오르니 무엇인들 온전했겠는가.
그래서 포도나무를 심어 넝쿨 채양을 올렸다. 평소에 장을 담그던 메뉴얼을 무시하고 항아리부터 아주 큰 것으로 바꾸었다. 소금농도는 줄이고 물의 양은 늘려 잡았다. 포도나무를 심기 위해 꽤 깊이가 느껴지는 고무통에 남편과 함께 배낭을 메고 산에서 채취한 부토로 가득 채웠다.
팔뚝만 한 둥치에 T자 모양으로 뻗은 가지에는 제법 꽃눈이 자잘하게 맺혀 한눈에 보기에도 실한 묘목이었다. 어느새 뿌리가 내리고 장독대 유리뚜껑 위로 설탕 알갱이처럼 자잘한 꽃잎을 떨구었다.
벌들은 연신 은하수를 건너듯 별 모양의 노란 꽃가루를 날랐다. 탱글탱글 초록빛으로 살찌우는 포도송이를 볼 때마다 마음이 흡족했다. 내 인생도 저 포도송이들처럼 탱탱하게 영글어가고 있는 거 같아서다.
태풍도 잘 견디고 주렁주렁 포도가 탐스럽게 익어갔다. 장독과 포도나무가 천생연분을 만난 듯 가을 햇살에 빛깔이 서로 닮아가고 있었다.
이듬해 새봄을 맞았다. 지난해 가을 결실에서 진 일보한 나는 온통 포도나무에 대한 기대로 가득 찼다. 인터넷을 뒤져 해충관리와 재배법을 익히고 특수 조건임을 염두에 두고 꼼꼼히 관찰해 왔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대체 저 놈이 묵묵부답이다.
조급증을 앓던 사월을 겨우 넘기고 오월을 맞았다. 다른 나무들에 비해 잎눈이 늦게 나오는 대추나무 무궁화나무도 이미 새순을 틔우고 있는걸 보면 이건 분명 아닌 거 같았다. 냉해로 인한 것이라면 더더욱 아닌 게 분명했다.
담쟁이나 넝쿨장미는 한 번도 이런 일이 없었다. 잔가지를 꺾어보고 목피를 벗겨보아도 통 가늠할 수가 없었다. 시간이 갈수록 조급증은 더해지고 슬슬 화가 나기 시작했다. 배신을 당한 듯 한 허탈감이랄까.
다시는 된장을 망치고 싶지 않았다. 더 늦기 전에 포도나무를 베어내고 등나무를 심어야겠다는 다급함 뿐이었다. 급기야 톱날을 들이댔다. 뿌리에서 한 뼘 높이의 둥치에다 힘을 가했다. 목피와 재질이 질겨 톱질이 쉽지 않았다.
아뿔싸, 톱질이 끝나갈 무렵 갑자기 코끝이 찡했다. 포도 나무 수액의 진한 향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 황당함을 어찌해야하나, 긴장하고 있던 온 몸에서 맥이 탁 풀렸다. 내 몸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것만 같았다.
한참동안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좁은 공간에서 어찌나 단단하게 흙과 뿌리가 서로 엉켰던지 수십 만 킬로미터의 혈관을 도려내는 거 같아 심장이 마구 쿵쾅거렸다. 그 후로 나는 옥상에 가는 일이 뜸해졌다. 채소들도 엉망이 되고 말았다.
핑개거리가 생겨 긴 여행을 떠났다. 오랜만에 여행에서 돌아와 된장을 가지러 옥상에 들렀다가 그만 놀랄만한 일이 눈앞에서 펼쳐졌다. 지난해 포도나무를 베어낸 자리에 등나무를 심었지만 그 역시 올봄에는 잎을 피우지 않았다.
당연히 죽은 줄만 알았던 등나무가 연둣빛으로 내게 손짓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다가가 이파리를 만져보았다. 눈물이 핑 돌았다. 내 멋대로 판단하고 서둘러 베어버린 포도나무에 대한 죄책감에 순간 울컥했다.
생명의 경이로움이 이런 것이구나 생각하니 그간의 경솔함이 부끄러웠다. 다시 생기를 찾은 옥상정원이다. 모든 생물은 다 저마다 때가 있고 환경에 따라 다르다는 것을 까맣게 잊고 있었뎐 거 같다.
같은 시기에 심었더라도 산에서 캐 온 담쟁이나 아파트 담장에서 채취해서 꺾꽂이를 한 넝쿨장미는 자연환경에 이미 적응이 잘 되었을 거라는 짐작은 왜 못했을까. 포도나무는 묘목장에서 자랐다는 생각을 진즉 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것들은 나름대로 주어진 생명을 부지하려 땡볕의 긴긴 사막과 깊디 깊은 혹한의 동토를 건너느라 얼마나 발목이 시렸을까. 그것은 침묵이 아니라 울부짖음보다 더 깊은 시름이었던 것을.
천상의 소리가 이런 것일까 포도나무 등걸 위로 사륵사륵 봄비가 내린다. 단비에 온통 푸성귀입이 귀에 걸렸다. 그 위로 달팽이 한 마리가 몽기작거리며 기어오른다.
목덜미를 타고 흘러내리는 빗물이 등줄기를 파고든다. 그 어떤 것들과 맞닥뜨려도 느긋이 사랑하고 진득하게 기다리며 한 걸음 더 물러서서 지켜보라는 마음의 팻말을 가슴에 꽂아본다. 세상이 온통 총알 투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