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08
동서문학회는 동서문학상 수상자들의 모임이다. 회사의 후원으로 해마다. 문학기행을 떠나는 행운을 누린다. 작가이기 이전에 주부의 역할이 우선인 우리 여성 문우들은 유월이 오면 소녀처럼 가슴 설레는 멋진 여행을 꿈꾼다.
올해는 내가 그 책임을 맡은 첫해이다. 아주 특별한 문학기행을 기획하려고 연초부터 자료수집에 나섰지만, 17년이란 연혁의 갈피에는 거의 안 가본데 없이 추억과 감동이 곳곳에 서려 있다. 재정과 일정, 문우들의 취향을 고려하여 나만의 새로운 테마를 연출해 낼 수 있는 코스를 정한다는 게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머뭇거리는 동안 시간은 흘렀고 마음은 급해졌다. 그때 불현듯 아, 서라벌! 하고 나도 모르게 소리쳤다. 답사 갈 필요도 없는 내 고향 신라 천년의 고도古都 서라벌이 있지 않은가,
나는 양동국민학교 50회 졸업생이고 일찍 고향을 떠나왔지만 친정은 아직 고향에 남아 있다. 시댁도 포항이라 자주 다녀오지만 스쳐 지날 뿐이다. 그래서인지 한 번도 경주, 포항에 대해서 특별히 생각해 본 적은 없다.
삼년 전 일선에서 은퇴한 나는 틈틈이 여행을 즐기는 편이다. 동,서유럽과 러시아 등 동남아의 유서 깊은 古都를 두루 섭렵하고서 한동안 유럽의 고대도시 설계와 중세의 건축미에 흥분을 가라앉힐 수가 없었다.
그리고 막연하게 마음 한 구석이 텅 빈 느낌이 들었다. 반만년의 유구한 역사를 지닌 우리나라 문화유산이 참 초라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서라벌일까?
고향은 아마도 낚아놓은 물고기 마냥 언제든지 입맛에 맞는 요리는 시간문제라고 나의 무의식중에 입력이 되었나 보다. 경주하면 불국사요. 수학여행 코스라는 선입견을 우선 벗어 던져야 했다.
고향 친구와 친지들을 총동원해서 나름대로 낯설기의 코스를 설정하는 것에 신경을 썼다. 꼼꼼하게 일정을 체크하고도 마음이 놓이질 않았다. 수많은 문화유산을 다 체험할 수 없는 안타까움에 별도의 자료집을 발간해서 나누어 주기로 했다.
여행을 떠나는 날, 전국 각지에서 모인 회원들이 관광버스 한 대를 꽉 메우고 서울역 앞에서 출발했다. 차창 밖에는 유월의 짙푸른 녹음 위로 간간이 비구름이 몰려왔다.
진행자인 나로서는 일정에 차질이 생길까 속으로 애를 태웠다. 빗방울이 떨어지자 모두 들뜬 기분으로 비도 반가운 동행자라며 수다를 떤다. 서울을 벗어 나자 자기소개 순서가 되었다.
배꼽을 잡는 우스갯소리도 눈시울을 적시는 아픈 사연도 모두가 우리들이 살아 내야 할 삶의 등고선들이다. 아무쪼록 풋풋한 자양분이 되어 가슴 찡한 한 편의 블랙코미디로 기억되었으면 한다.
아침 일찍 출발한 우리들은 어느새 경주 톨게이트를 돌아 도착점에 닿으니 점심시간이 딱 맞아 떨어졌다. 대능원 후문 근처에 있는 쌈밥집에서 첫발을 내딛는 순간, 진행이 순조로울 거 같아 기분이 좋았다.
고향집 앞마당처럼 자잘한 꽃들이 피어있는 화단을 지나 툇마루를 딛고 올라선 대청마루, 소박한 밥상에 오른 푸른 콩잎 삭힌 것이 화제가 되었다. 타지방 문우들은 콩 비린내가 나는 낯선 반찬을 두고 이런저런 실랑이를 하면서도 왕성한 식욕을 뽐냈다.
나는 풋 콩잎에 갈치속젓을 얹어 오랜만에 고향의 맛을 음미하니 혀끝에서 삐릴리~ 풀피리 소리가 날 것만 같았다. 즐거운 식사 시간을 마치고 대능원 후문으로 들어가 천마총 관람에 앞서 우리들은 시원한 나무 그늘에 둘러앉아 해설사의 재미있는 이야기를 듣고 관람을 시작했다.
13대 미추왕릉과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와 왕비, 그리고 2대 남해왕, 3대 유리왕, 5대 파사왕이 묻힌 오릉의 전설도 들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 배도 든든하게 채웠으니 정문에서 대기하고 있는 버스를 타고 우리들은 본격적인 코스를 따라 이동하기로 했다.
안압지
▶출발(서울역.앞)⇒경주(점심)⇒대능원⇒동리.목월/문학관⇒통일전⇒석굴암⇒계림(반월)⇒안압지⇒숙소(교육문화회관)⇒기림사⇒양남/주상절리⇒해변도로⇒구룡포/호미곶)⇒죽도시장(회센터/점심)⇒양동마을⇒이천(쌀밥/저녁)⇒(서울역 앞)도착◀
조촐한 다과회를 준비하고 우리들을 기다리고 있을 동리.목월 문학관견학 에 늦지 않으려고 서둘러 출발했다. 명품 보리떡과 포항거주 문우의 역할이 빛나는 순간이다.
관장님과 지역 문인들과의 짧은 만남이 아쉬웠지만 잊지 못할 추억거리를 또 하나 만들었다. 마침 문학관 마당에서 KBS의 ‘명작 스켄들’ 촬영에 합류한 세 명의 문우가 박목월 시인의 시 가곡 ‘이별의 노래’를 멋들어지게 불러 후일 우리들을 한층 설레게 했다.
다음 코스는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통일전이다. 박정희 대통령취임 당시 분단국가인 현실을 비통해 하며 신라 삼국통일의 민족적 기상을 기리기 위해 건립하였다고 한다.
주변의 경관이 뛰어나고 역사의 기록이 그림으로 보존되어 있어 관람하기에 편했다. 우리 일행이 기념사진을 찍고 있을 때, 정원에서 풀을 뽑던 할머니들의 걸 진 사투리와 투박한 미소가 정겨워 함께 기념사진을 찍고 석굴암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불국사는 곁눈질로 대신하고, 이튿날 기림사에 들리기로 하였다. 흐렸다 맑았다를 반복하는 날씨는 여행길 수호천사처럼 따라다녔다.
토함산 고갯길의 우거진 숲을 오를 때는 숲 사이사이로 얼비치는 햇살과 시원한 바람이 이수인 곡의 ‘석굴암’을 목청껏 불러보고 싶은 충동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노랫말처럼 막달아 아늑한 여기,
굴이 하나 열려 연좌에 앉으신 님은 웃음마저 좋으신데, 앞을 가린 누각이 좀 아쉬움을 남겼다. 아름드리 깊은 숲의 정취를 마음껏 누리며 산길을 내려와 다시 계림으로 향했다.
버스 안에서 나는 반월성에 대한 일화를 들려주었다. 어느 날 석탈해가 토함산에 올라 서라벌을 내려다보니 초승달 모양의 봉우리에 집 한 채가 보였다. 호공이란 사람의 집이었다.
탈해는 그 집과 봉우리를 빼앗으려고 온갖 잔꾀를 부리며 자기 조상의 집이었다고 우겼다. 억울한 호공이 법정에 상소하자 탈해는 결국 승소를 꾀한다.
이 내막을 알게 된 2대 남해왕이 탈해를 범상치 않은 인물로 여겨 사위로 삼고 나중에 신라 4대 임금이 된다. 탈해가 죽자 5대왕인 파사왕이 이곳에 궁성을 쌓고 새 궁전을 지었다는 이야기다.
기림사
첨성대를 지나 멀리 반월성을 끼고 안압지를 향해 무리지어 걸으면서 나는 수천 년 전의 서라벌에 대한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과연 천년의 古都를 생생하게 느낄 수 있는 깊고 수려한 숲과 유적들,
그리고 안압지에 들어섰을 때의 단아하고 기품 있는 건축물을 대하면서 유럽의 화려하고 거대한 도시들과 반추해 보는 성숙함도 맛보았다. 무엇보다 나는 이번에 문학기행의 자료집을 발간하면서 다시금 긍지를 갖게 되었다.
실제로 경주에는 널린 것이 유물이요 밟히는 것이 유적이라는 표현이 괜한 게 아니었다. 보물 또한 화려한 외형보다는 조상들의 정기와 얼이 깃든 우리만의 아름다움이 살아있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되었다.
이튿날 기림사에 대해서 아무런 정보도 없이 무작정 길을 나섰다. 절 마당에 들어서니 완만한 산자락엔 채 가시지 않은 운무가 걸쳐있고 스님 두 분이 비질을 하고 있었다.
아늑하고 상쾌한 기분으로 과거 천불 현재 천불, 미래 천불을, 모셔놓은 삼천불전을 마지막으로 돌아서려는데 스님 한 분이 아래 마당으로 내려가 보라고 했다. 방금 비질한 자욱 위로 발자국을 찍으며 총총이 내려갔다.
오랜 세월 단청이 빛에 바래서 그 느낌이 한층 고색창연한 대적광전 앞에 닿았다. 어느새 두 문우가 호흡을 맞춰가며 커다란 삼존불상 앞에 정성껏 촛불을 켜고 있었다. 그 공손하고 낮은 몸짓이 무척 아름다워 보였다.
여느 절과는 또 다른 분위기의 고적함에 매료되어 해맑은 풍경소리를 뒤로하고 버스는 양남으로 향했다. 주상절리는 주로 현무암질의 용암류에 나타나는 다각형 기둥의 바위 군락이다.
제주도의 주상절리가 수직이라면 최근에 발견된 양남의 주상절리는 부채 살 모양과 장작더미 모양을 하고 있어 더 신기했다.
국내의 다른 지역보다 약170만년이나 먼저 형성된 것이라고 한다. 변변한 진입로와 주차시설이 없어 조금 불편했지만, 키를 넘는 수풀을 헤치고 아슬아슬하게 난간을 딛고서 쪽빛 바다에 떠 있는 낯선 풍경을 카메라에 담느라 모두들 탄성을 질러댔다.
경주 양남 주상절리
한 시간 남짓 해안도로를 달려 철과 항구도시인 포항 호미虎尾곶에 도착했다. 이곳은 우리나라 지도 모양의 호랑이 꼬리에 속한다. 바다 가운데 커다란 손 구조물 위에는 서늘한 바닷바람을 타고 하나둘씩 갈매기 꽃이 피기 시작했다.
해양 공원을 한 바퀴 빙 돌고 나니 배꼽시계가 요란하게 울렸다. 항구도시에 왔으니 풍성하고 펄떡거리는 별미를 즐길 차례다. 죽도시장 횟집에서 평생에 잊지 못할 미각을 돋우며 행복한 식사를 마치고 지난해 하회마을과 더불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양동마을을 찾았다.
형산강을 끼고 잠깐 달리는 사이 양자동 간이역 굴다리를 지나고 있었다. 이 길은 내가 초등학교 시절에 형산강을 건너 매일 같이 등교하던 이십 리 코스모스 길이다. 심고 가꾸고 즐기는 것 모두가 우리들의 몫이었다.
나는 육 년간 이 길을 다니면서 코스모스 핀 시골 여학교의 국어 선생님이 되는 꿈을 키웠다. 이 마을 이장인 L씨는 초등학교 후배다. 우리들이 약속 시간을 어기는 바람에 밭일을 나가다 말고 안내에 나섰다.
안골에 있는 월성손씨 고택인 서백당과 물봉골의 여강이씨 대종가인 무첨당을 답사키로 했다. 서백당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살림집이며 이 마을에서 시조가 된 양민공 손소가 조선 성종 15년에 지었다고 한다.
나의 죽마고우의 집이기도 하다. 육백년 수령의 향나무가 나를 반기듯 감회가 깊었다. 무엇보다 이곳은 조성된 문화재공간이 아니라 주민들이 예부터 거주해 온 전통 마을이다.
분통골 언덕배기에 있는 아흔아홉 칸의 관가정에서 내려다본 양동초등학교, 이 고장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오랜 역사를 자랑하던 교정은 간데없고 아담한 한옥의 교정을 바라보니 흐르는 세월이 덧없음이 실감 났다.
우렁찬 교가가 들려오는 듯 점점 멀어져가는 고향 땅, 이번 여행이 나의 태생적 DNA를 따라 1박2일간의 행적을 그린 최고의 여행이었다.
서백당 600년 넘은 서백당 향나무 무첨당
서라벌 궁전 서라벌 도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