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능력한, 너무 무능력한

by 조이 킴



학교 공식 머쉬룸 헤어스타일


뉴질랜드에서 아이들의 머리를 직접 깎아준지 4년차. 바가지 머리 그만 만들고 이렇게 저렇게 해달라고 주문을 하던 큰 아들이 그 어떤 주문에도 항상 똑같은 결과물이 나오는 것을 알아챈 후로는 어느 순간 주문하기를 포기했다. 다만, 너무 심한 바가지만 만들지 말아 달라고 하면서 얌전히 자기 머리를 내 손에 맡긴다.


올해 중학교 3학년인 큰 아이는 적응이 되어서인지 엄마가 자신의 머리카락을 자르는 것에 대해 이제는 당연하게 생각하는 눈치다. 큰 아이가 초등학교 5학년, 자기 외모에 신경을 덜 쓰는 나이에 시작했으니 이제는 익숙해져서 그나마 가능했지 싶다. 한창 외모에 신경 쓰는 지금 나이에 머리를 손질해주겠다고 나섰다면 처음부터 큰 난관에 부딪혔을 것이다.


근래에는 자기 머리 스타일을 가지고 농담도 하는 경지에 이르렀다. 중학교에 들어간 첫 해, 학교 친구들 사이에서 ‘학교 공식 코리안 머쉬룸 헤어스타일’로 뽑혔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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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질랜드 이민 초기인 큰 아이 초등학교 때 미용을 해주던 모습








도대체 난 무엇을 아웃소싱한 것일까?


큰 아이가 오늘은 왜 엄마가 직접 머리카락을 자르게 되었는지 묻는다.


결혼 전에 시작한 학원 사업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은 후 계속 확장되었고, 내가 감당해야 할 일이 점점 더 많아져 갔다. 자연스럽게 가사와 육아는 도우미 아주머니들의 도움을 받아서 해결했다.


둘째 아이가 내 삶에 들어오고, 이혼을 하면서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야 할 일은 더욱 늘어났다. 늘 심신이 피곤하니 아이들한테 나눠 줄 에너지를 아끼고자 반드시 내가 해야 되는 일이 아니면 가능한한 많은 일들을 돈을 들여 남의 손을 빌렸다. 사업장에서 또 집안에서 다른 사람에게 위탁할 수 있는 일들은 모조리 아웃 소싱했던 것이다.




그러다 학원 사업이 내리막길을 향하면서 지출을 줄여야 했고, 다른 사람의 손을 빌려서 해결했던 그 일들을 직접 해내야 했다. 그동안 다른 사람에게 위탁했던 일들을 다시 나의 일로 가져오는 과정은 꽤 힘들었다. 먼저는 그 과정이 자발적인 것이 아니라, 사업체가 잘 굴러가지 않음으로써 발생한 일이었기 때문에, 정신적 고통이 함께 따라왔다.


시간과 에너지가 부족하다 느꼈기에 시작했던 아웃소싱이었다. 지금 내 시간과 에너지는 그때보다 더 부족한데, 이제는 그 아웃소싱을 끝내야 했고, 게다가 그 일들을 처음부터 다시 배워야 하니…….


사실 사업체에서 내가 새롭게 맡을 일들을 배우는 것은 그리 힘들지 않았다. 무엇보다 너무 힘들거나 오래 걸리는 일은 그나마 포기할 수가 있었다. 그런데, 집안일과 아이들 돌보는 일은 좀 다른 문제였다. 이혼으로 인한 남편의 빈자리까지 내가 채워야 했고, 내 사정과는 상관없이 아이들은 나의 돌봄을 필요로 했다. 매일 반복되는 먹고, 자고, 입는 일들을 필수적으로 해야 했기에, 가사와 육아에 있어서는 내가 힘들고 오래 걸린다고 그만 둘 수가 없었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해내야만 하는 일이었다.








초등학교때부터 밥을 짓고 빨래를 했지만


나는 초등학교 고학년때부터 밥을 짓고 빨래를 하고 청소를 했다. 나는 남해안의 섬마을 가난한 가정에서 5남 2녀의 막내로 자랐다. 하나 있는 언니는 나보다 10살이 많아서 내가 초등학교에 들어갈 당시 이미 객지에 나가 고등학교를 다니고 있었고, 집에는 내 위로 오빠들 세 명이 있었다.


그 시절 집안 일들은 당연히 여자들의 몫이었으니, 생계를 해결하기 위해 바쁜 엄마를 대신해서 밥을 짓고 청소를 하고 빨래를 하는 일은 고스란히 내 몫이었다. 그리고 고등학교 때부터 나도 객지로 나가 자취 생활을 했기 때문에 비록 최근까지 남의 손을 빌려왔어도, 탄탄한 실전 경험을 믿으며 나도 집안 일에는 나름 자신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것은 정말로 매우 큰 착각이었다. 그때와는 다르게 이제는 내가 책임져야 할 어린 생명이 둘이나 있었다. 게다가 그동안 아이들은 아주머니들이 해주시는 고급진(?) 반찬과 돌봄을 받는데 익숙해져 있었다. 높아진 아이들의 입맛을 어느정도라도 맞추어 준다는 것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처음보는 새로운 소스들과 새로운 식료품은 왜 그렇게 많은지……. 식재료들을 하나씩 실험해 가며 나에게 맞는 것들을 찾아 나가는 일도 엄청 힘든 일이었다. 빨래와 청소는 기계의 도움을 받아 해결하면 되니까 그리 힘겹지 않았는데, 매 때마다 찾아오는 식사 준비는 늘 마음의 저항을 느낄 정도로 힘들었다.


사업이 잘 되고 돈이 잘 벌릴 때는 현명하게 여겨지던 그 아웃소싱이 내 손발을 잘라내 스스로를 일종의 불구로 만드는 일이었음을 나는 그제서야 깨닫게 되었다.








무능력한, 너무 무능력한


요리도 어느 정도 손에 익고, 빨래와 청소도 어느 정도 규칙을 세워서 해 나가던 어느 날, 한 단계 상승된 자각이 일어났다. 나는 여전히 무능력하다는 사실이었다.


조금이라도 품이 많이 드는 요리는 반조리제품을 사서 요리했고, 청소는 청소기가 도와주고, 빨래는 세탁기가 도와주는 일상에서 내가 온전히 처음부터 끝까지 내 손으로 해내는 일이 거의 없다는 것을 자각하게 된 것이다. 아주 간단한 것임에도 다른 사람이나 기계의 힘을 빌리는 것이 당연시되어 버린 삶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공허했다.








DIY 천국, 뉴질랜드에서 다시 시작하기


그 즈음, 나는 뉴질랜드로 이민을 준비하고 있었다. 미용사 자격증과 베이커리 파티쉐 자격증이 영주권을 받고 정착하기에 유리하다는 말을 들었다. 출국까지 3개월이 좀 넘는 시간이 있었다.


파티쉐보다는 미용을 배워 놓으면 설령 자격증을 못 딴다 하더라도, 아이들의 머리는 직접 잘라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참 나의 무능력을 실감하고 있던 참이라서 미용을 배워 아이들의 머리카락을 잘라줄 수 있다는 생각은 무척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뉴질랜드는 DIY 천국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무엇이든 '무료' '대행' 서비스가 당연한 한국과는 완전히 다르다. 뉴질랜드에 가면 아이들 머리카락 자르기부터 시작해서 많은 일들을 스스로 해 보리라 다짐도 하면서 나는 기쁘게 미용이라는 기술을 배우기 시작했다. 재능이 없어서인지 시간이 지나도 늘지 않고 또 돈 주고 배웠다고 말하기에도 부끄러운 실력이지만, 나는 여전히 아이들의 머리를 깎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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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용을 배우며 구비했던 미용 재료들. 둘째 아이 시후의 머리를 잘라주는 모습


이 행위는 나에게 ‘진정한 삶의 능력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끊임없이 하게 만든다. 이 질문은 자칫 남의 손을 빌려 살아가던 삶의 형태로 쉽게 빠져들어가지 않게 하는 일종의 방패막이며, 내 삶은 내가 꾸려간다는 자기 효능감을 높이는 방법이다. 나의 두 발을 허공이 아니라 땅에 단단히 뿌리내리는 것이다.








아이들에게 빚진 추억들


한국에서 학원 사업을 하는 동안 나는 아이들과 충분히 시간을 보내거나, 시간이 있더라도 재미있게 잘 놀아주지 못했다. 첫번째는 신체적 에너지가 별로 없었고, 두번째 이유는 싱글맘으로서 생계해결에 골몰하느라 창의성의 기초가 된다는 심적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뉴질랜드에 온 이후, 아이들 머리 깎기는 아이들과 나만의 추억을 쌓아갈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되어 주었다. 늘 아이들에게 빚진 마음이 있었던 나는 이 머리 깎기를 통해 나중에 아이들이 웃으며 이야기할 수 있는 ‘꺼리’를 만들어주고 있음이 기쁘다.


돈을 아끼느라 엄마가 자신들의 머리를 직접 깎는다고 생각하고 있던 큰 아들이 그 이면에 있는 이야기를 듣고는 조용히 머리를 끄덕인다. 무엇을 얼마나 이해하고 받아들였는지는 모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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