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리는 신앙
읍내 다방에서 맞선이 이뤄졌다. 그 자리에 서른다섯의 노총각은 어깨까지 찰랑대는 긴 머리를 한 채 모친과 함께 나타났다.
그 첫 만남에 거부 반응을 일으키지 못한 채 대충 넘어간 것이 시발점이었다. 그 후 내가 알고 싶은 것과 속도보다 예비 시어머님의 궁금함과 극성 덕에 결혼은 일사천리로 추진되기 시작했다.
한 달 남짓 남은 결혼식 날짜를 들고 온 예비조카사위를 맞은 삼촌께서 한 말에 놀랬다.
"자네, 말 더듬지?"
그때까지도 나는 전혀 눈치를 못 챘었다. 그냥 신충해서 답을 더디 하는 줄로 알고 있었고 외려 진정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농사일을 해야 한다는 것과 종교가 다른 것이 큰 변수이긴 했지만 만남의 횟수를 거듭할수록 어쩐지 편했다. 그것이 결혼할 배우자 조건 중에 꼭 필요한 촛불 중 하나는 켜진 상태라 생각했다. 살다 보면 나머지도 하나씩 더 켜질 걸이란 기대감을 갖고 있었다.
성당 신부님께서 혼인 사전교육을 받던 중에 예비남편에게 먼저 질문을 했다.
"자녀는 몇 낳을 겁니까?"
"다섯은 낳아야지요'라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순간 살짝 당황했다. 그때까지 자녀계획에 대해서는 이야기한 적이 없었던 것이다. 신부님께서 잠시 호흡을 가다듬고 내게도 똑같은 질문을 하셨다.
"자매님은 몇 명을 낳을 건데요'
"최선을 다하면 셋은 낳을 수 있겠지요."
라고 나름 최선을 다해 줄여 말했다. 그렇게 그만 얼결에 하느님의 대리자인 신부님 앞에서 약속을 했던 것이다. 그때 그 말대로 결혼 이후 비쩍 마른 몸이건만 다른 사람에 비해 쉽게 아이 셋을 낳았다. 그리고 그것이 내가 세상에 태어나 제일 칭찬을 많이 듣게 된 일이었다.
하지만 신앙생활은 달랐다. 첫아이를 임신하고 외출이 불편한 것을 시작으로 가끔 남편이 태워다 주던 것이 멈춰졌다.
부지런한 시댁식구들은 젖소와 참외는 물론 논밭농사가 사시사철 이어졌다. 성당으로의 발걸음은 점점 멀어져 갔다. 그만큼 마음도 평정심을 유지하지 못해 소용돌이치다가 우울할 때가 많았다.
그때쯤 자그마한 문제가 생길라치면 마을사람들 손에 생 대나무가 들린 채 집안에선 깊은 밤에도 북소리가 종종 들렸다.
그럴 때면 집안에 문제가 일어나는 것은 큰 며느리가 성당을 가서 생기는 것이라는 결론을 매번 강조했다.
일이 많고 아이도 키워야 하며 경제권까지 주어지지 않아 불편하기 그지없는데 종교문제가 매번 불거지니 하루하루가 가시방석이었다. 급기야 남편이 먼저 피부병이 와서 이기지 못하고 스스로를 괴롭힐 지경이 되었다.
그때쯤 일 년에 두세 번 이나마 나서던 대축일 미사조차 멈추게 되었다. 행동이 멈추니 마음도 자연 굳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