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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산 아래 첫 집 9

뜬구름

by 하리

어쩌다 결혼하여 엄마가 되고 보니 낯설지만 설레고 기쁜 마음은 몽글몽글 피어올랐다.


먼 기억 속 내 부모님의 대화 속에 나의 미래는 의사였다.

아래로 남동생들이 태어났어도 첫 아이라 거는 기대가 컸던 것이다. 그 꿈은 이름 하나 가리키는데 몇 날며칠 걸릴 때 이미 포기했어야 했다. 하지만 내 부모님께선 쉬 포기 못 하고 오래 간직한 통에 점점 더 실망하면서 아쉬움만 거듭 드러내는 결미를 맞은 것이다.

세월이 속절없이 흘러서 부모님과 온 가족의 기대에 전혀 미치지 못한 채 나 역시 얼결에 엄마가 되었다.

두렵고 떨리는 첫아이와의 대면은 큰 울음소리로 시작되었다. 시어머님과 남편이 같이 있는 아가방 앞에서 간호사는 겁도 없이 남의 집 귀한 손녀에게 '울보예요.'라고 하며 건네주었다. 신기하게도 내가 안자마자 울음을 뚝 그치는 것이었다.

그때부터 본격적인 육아전쟁이 시작되었다. 잠시도 떨어지지 않으려 해서 안거나 업고 있었다. 심지어 부엌에서 밥을 차리는 동안에도 등에서 내려놓을 수가 없었다.

낮잠을 재워야 할 때도 엉덩이만 들썩이면 울었다. 체력이 한계가 있어 꾀를 낸 것이 잠재울 때 직접 지은 노래를 불러 주었다.

그 노래는 아기에게 거는 기대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우리 아기 똑순이 깔끔이 튼튼이 쑥쑥이

놀 때도 잘 때도 점잖이 예쁜이 (사이 이름을 넣어 불렀다.)

그래서인가? 거의 제 개월수를 채웠건만 간신히 인큐베이터를 면한 2.6kg으로 태어났어도 잘 자라 주었다.

문제는 개월수가 올라갈수록 점점 자라는 아이 속도에 맞춰서 옷이나 기타 물품들을 살 수가 없었다. 벌써 태어나기 전에 시댁친척집에서 먼저 사용한 물건과 옷들이 한 보따리씩 주어졌다. 그때 알았어야 했는데 눈치 없게도 난 언젠가는 하고 기다렸던 것이다.

모유를 먹이다 보니 한 달에 1킬로그램 빠지는데도 처음 삼칠동안 먹은 미역국 외에 산모를 위한 음식은 따로 없었다. 그때쯤 들일과 집일에다 산바라지까지 하고선 몸져눕게 된 어머님께서 여름엔 멀리 절로 요양을 떠나셨다.

시원찮은 새댁인 내가 온 가족의 밥은 물론 아기를 돌보고 빨래까지 도맡아야 했다. 한 달은 족히 지나서 어머님께서 오셨을 때는 벌써 추석 맞을 준비를 할 때였다. 그때 밥상 주변의 가족수는 아기를 포함하여 일곱 명이었다. 오래지 않아

작은 시누이와 도련님은 직장 따라 읍내로 분가를 해서 식구수가 줄긴 했다.

모내기철이 다가오니 모두들 시장이 반찬이었겠으나 된장과 묶은 김치와 부추겉절이 위주의 밥상은 늘 미안고 아쉬웠다.

이전에 중매쟁이가 전하기를 냉장고에 고기가 가득하다는 말은 맞지 않았다. 시댁은 먹는 것과 입는 것을 아끼는 성향이었다. 모두들 일을 할 때는 손발이 척척 맞았으나 나머지 부분에 있어선 보통의 집보다 나은 게 별반 없었다.

짧은 기간이나마 예비신랑과 데이트할 때 선뜻 내어주던 밥값등은 그때가 전부였다.

또 아기에게 들어가는 비용도 병원 가기 전 준비물을 살 때가 제일 지출이 많았다. 그래도 첫애는 모유가 부족해 6개월부터 분유를 줘야 했는데 보통의 분유는 설사를 하거나 피똥을 누는 통에 좋은 것으로 먹였다. 그나마의 여유도 이내 금융 파동으로 인해 밑에 아이들의 분유는 보통으로 먹였다.


' 비록 시골 큰 살림이라 몸은 고달플 때도 있겠지만 누나 성향대로 규모 있게 돈관리 하는 재미로 살다 보면 보람도 있을 것이다.'

결혼 전 친정동생이 마치 오라비처럼 내게 한 말은 잠깐 부풀다 사라지는 뜬 구름같이 잡지도 못하고 쳐다보다 말 줄을 그때도 이후에도 오래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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