뻔뻔? 하루살이!

1. 멀쩡한 바지가 없다.?

by 하리

가족 연례행사인 묘사 지내는 날이었다. 남편은 수저 놓기 바쁘게 옷장을 뒤지다가 평소 같으면 아무렇지도 않을 차림일진대 앞섶이 터진 걸 보고선 외마디로 소리쳤다.

''멀쩡한 바지가 없네?''

설거지를 하다가 멈추었다.

'멀쩡한 게 없다고? 그럴 리가!'

장갑을 벗은 뒤 방으로 가서 옷장을 뒤졌다. 초겨울에 입을만한 걸로 몇 개 내어놓고는 설거지를 마저 하고 있자니 남편이 다시 옷을 갈아입는다고 부스럭거렸다.

이전 같으면 그 한마디로 그칠 사람이 아닌 데하며 어색한 적응 시간이 지난 뒤에 다시 한번 곱씹었다.

'멀ㆍ쩡ㆍ한ㆍ바ㆍ지ㆍ가ㆍ 없다.'

글자 한 자 한 자가 내 발 앞에 와서 개울에 있는 징검다리 돌처럼 놓였다.

'멀쩡 ~한, '

내 생에 지금껏 멀쩡한 때가 있었던가?

'멀쩡'이란 단어가 주는 의미가 뜻하는 건 그 말을 하는 사람의 의도와 말할 때의 태도와 내뱉고 난 뒤의 느낌이 다를 것이다.

또한 듣는 사람의 현제 마음 상태와 평소 가진 관념들로 인해 해석이 다를 것이다. 조금은 더 진지해진 자세로 설거지가 마무리될 때까지 생각에 각이 꼬리를 물었다.

'멀쩡하다'란 용어를 사전으로 찾아보니 '온전하고 정상적인 상태'란 뜻이다. 또한 예사롭거나 뻔뻔하다는 의미도 있다는 것이다. 돌아보면 내 삶의 대다수가 멀쩡하지 못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마음이 아프거나 몸이 아프거나 휘청대거나 흔들리거나 아님 숨어 있다거나 그래도 굳이 멀쩡할 때를 찾는다면 교육을 받는답시고 얌전히 앉아 있을 때나 하늘을 보거나 꽃이 예뻐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볼 때나 정말 재미난 드라마나 영화를 보고 있을 때다. 아주 가끔 신나는 책을 보거나 표현하고픈 글이 잘 쓰이거나 하면 그럴 때도 있긴 했다.

하지만 이내 별일 아닌 것에도 또다시 우울해졌다. 마치 마음에 진눈깨비가 내린 듯이 스르르 의욕이 떨어져서 움직이기 싫어서 날씨나 기타 등등 불편한 그 무엇을 핑곗거리로 찾느라 괜스레 고요한 마음을 휘저어 놓곤 했다.

그러고 보니 이번 같은 때는 적어도 내겐 참 드문 경험이었다. 첫 번째로 멀쩡했던 것은 있는 그대로 보고 느낀 대로 배짱 좋게 툭 던진 남편의 한마디였다. 이전 같으면 묘사고 뭐고 불꽃 튀게 한바탕 소란스러웠을 아침이 될 수도 있었다.

두 번째는 터진 바지도 그냥 옷장 속에 두고 뻔뻔스레 멀쩡한 바지도 많다며 주섬주섬 찾던 나의 또 다른 멀쩡한 대응이었으라. 그 덕에 지난날 그 어느 때보다 우리 부부로선 멀쩡한 날이 되어서 그 여파가 다른 가족에게로까지 전파되었다.

묘사를 지낸 후에 시부모님 내외분과 그 아래 사남 중 삼남 내외와 사촌들과 조카까지 모여서 점심상도 맛나게 먹은 뒤에 김장용 마늘까지 깠다. 이전보다 훨씬 절약된 단답형 요구로 던진 말을 멀쩡하게 잘 받아서 그런가 싶었다.


앞으로도 그저 온전히 멀쩡할 때를 바라기보다 그저 뻔뻔하게라도 멀쩡할 일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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