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가뭄 탓에 내내 기다리던 봄비가 며칠 동안이나 내렸다. 그 덕에 한동안 올라가던 기온이 그만 뚝 떨어져서 마당 나서기도 망설여졌었다. 그러다가 비가 멈추었고 볕이 환하니 좀은 시원한 봄날이 되었다.
"감자씨가 있나 몰라 "
남편이 아침을 먹다가 불쑥 말을 걸어왔다.
" 작년에 집에서 캔 거 남은 게 좀 있잖소? 그래도 반 박스는 좋은 거 사는 게 어떠우?"
"벌써 사 심고도 밭 골이 남았으니 하는 말이지!"
그랬다. 우리 부부는 젊을 때는 시도 때도 없이 싸우다가 근래는 주요할 때와 무엇이 불편할 때에라야 의사전달법으로 말을 한다. 그런 우리 부부가 주거니 받거니 대화한 게 얼마만인가? 기억 소환이라도 해야 할 판이다. 그렇게 모처럼만에 식탁에서의 짧은 대화가 종료되고 마당으로 나섰다.
딸은 코로나 격리에서 벗어나고 있으며 어머님께서도 넘어진 상황 뒷수습이 다행히 잘 되고 있는 중이시다. 그 사이에서 연거푸 놀란 나는 솟구친 잇몸이 겨우 가라앉았을 뿐 아직도 다 안정되지 못했다. 양치하면 피가 나고 안면 근육은 손만 대면 아프니 조심 또 조심히 운동과 쉼을 병행하는 중이었다.
마당에서 강아지 밥도 주고 까치소리도 들으며 서성대다가 풀을 뽑을 요량으로 괭이를 찾아 나섰다.
그때였다. 핸드폰이 울린다. 가만히 있다가 꼭 뭐하려면 전화가 온다 싶어 받지 말까 하다 발신번호를 보니 남편이었다.
근래 하도 예상치 않는 일들이 생기니 순간 당황했다. 방에서 나간 것은 알겠는데 어디 들에 가서 뭔 일이라도 생겼나 싶어 냉큼 받았다. 그런데 씨할 감자를 찾아오라는 거였다. 다행히 큰일은 아니구나 하면서 집 뒤로 돌아가니 밭 골에 쪼그리고 앉아서 한참 작업 중이었다..
낙농업을 하는 남편은 송아지가 태어나서 어미소가 되면 우유를 짜야하니 소 자라는 상태에 따라 길들여야 하기에 목소리가 큰 편이다. 사람들과의 대화 때에도 마찬가지다. 그렇기에 자기 의사표현을 해야 할 때는 차 안이든 집안이든 고래고래 소리친다. 그렇게 큰소리만 치면 다 되는 줄 알던 사람이 평소와 달리 좀은 낮은 말투로 그것도 전화로 나를 찾는다.
남편은 좀처럼 전화도 안 하는 성격이다. 십여 년 전 내가 몸이 안 좋아 집을 떠나 요양을 했던 몇 개월 동안에도 딱 한번 전화를 했었다.
그것도 내용인즉, '어디 단식하는 곳이 있는데 가보랴?' 였는데
가기 싫으면 혼자 알아서 하라고 전화기에다 고래고래 소리치면서 자기주장만 하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몇 걸음만 걸어 나오면 집인데 밭작업 중에 전화를 건 것이었다.
그만 토를 달지도 못하고 조심조심 남편의 요구대로 감자를 찾아내고 작업용 장갑과 모자를 쓴 채 엉거주춤 밭고랑에 엎드렸다.
느린 동작이나마 한골 두 골 심다 보니 감자골은 늘어갔다. 그런데 이내 팔다리 어깨 목이 아파왔다. 다행히 바람이 자서 별 무리 없이 비닐까지 다 덮는 그야말로 감자심기 대장전이 마무리되었다.
만약 무턱대고 남편이 평소처럼 소리소리쳤더라면 말로 동작으로 툴툴 대다 일 진척도 별로 없이 중도 포기할 수도 있었을 텐데,
참말 세상 오래 살고 볼일이다.
다음엔 남편이 무엇으로 날 또 놀라게 할지 기대되는 일 년 지계( 一年之計)가 막 실행 중인 봄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