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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월·문 코너) 시 속의 인물

늦봄의 시에는 사람이 살았다 ― 만당

by 콘텐츠플러스

380여 편이나 되는 늦봄의 시에서 내가 주목한 부분은 소재로 등장한 ‘인물’들이었다. 이름을 모두 헤아리면 어림잡아 150여 명이다. 놀랐고 생경했다. 인물 한 명 한 명이 기억해야 할 과거를 증언하고 있었다.


이들을 제대로 안다는 건 곧 역사를 배우는 것이라는 생각이 먼저 일었다. 한국 현대사를 되짚어보는 기회가 된다. 개별 인물의 생애와 사건을 공부하고, 당시의 생생한 역사 속으로 들어가 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역사와 민중을 위해 헌신했거나 희생했거나 고통 겪은 분들을 다시 드러내고, 이분들에게 몇 명의 독자라도 새로이 관심을 두게 되기를 희망했다.


이런 의도로 시작한 <시 속의 인물>은 시즌1부터 시작되어 시즌2로 이어졌다. 시즌2로 접어들며 이 코너를 대할 때마다 왠지 살짝 가라앉는 듯한 기분이었다. 대부분의 내용이 고통스러운 기억의 소환이라 그런 것 같다. 나와 비슷한 세대로 같은 시대를 살고 있던 청년, 학생들의 분신, 희생을 다룰 때는 착잡하고 미안한 심정이 아닐 수 없었다.


늦봄은 분신, 투신한 노동자와 학생들을 추모하며 “거룩하고 아픈 죽음을 읊조린” 시를 많이 썼다. 박종만, 송광영, 조성만, 김세진, 박선영, 김성애, 김상진 등의 열사 추모 시다.


조작과 고문으로 희생된 사람을 위한 추모 시, 투옥으로 삶을 빼앗기면서도 의지로 다시 일어선 사람들에게는 격려와 용기를 보내는 시도 여러 편 있다. 이수병과 인혁당 사형수들, 서승, 민향숙과 이철 등. <시 속의 인물>에서 이분들과 학생, 노동자 열사를 많이 다룬 이유다.


글감이 될 시 & 인물의 선정에 까다로운 기준이 있었던 건 아니었다. 독립운동가처럼 현대사의 큰 흐름과 관련된 분, 큰 족적을 남긴 존경의 인물, 국가적 사건 속의 인물, 민주화 과정의 열사 등으로 평범했다. 당연히 2~3주간의 조사만으로 제대로 알고 원고를 완성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게 전제 조건이다.


시즌2를 진행하며 인물 선정에 애로를 느꼈다. 많이 등장한 열사와 투옥 인물들을 줄이는 한편, 시의성이 강한 분, 생경하지만 중량감 있는 분을 내보이고 싶었으나 쉽지 않았다. 늦봄의 시와 인물에 대한 이해와 공부가 시작 수준에 불과한데도 욕심만 과한 내 탓이 컸다.


그런 고민 끝에, 놓쳤던 사람을 찾아내면 보석을 캐낸 기분이었다. 조화순 목사님의 경우가 그렇다. 목회자를 칭찬하는 시, 짧게 함축되어 금방 이해하지 못한 시여서 별 눈길을 주지 않았었는데, 어떤 분인지 깨닫게 되자 환희를 느꼈다. 글감 인물을 발굴한 기쁨만이 아니라, 감동적 삶을 산 존경스러운 분을 알게 되었으니 말이다.


<나는 보았다 - 조화순 목사에게 바치는 시>는 18줄로 쓰였다. 인물 소재 시로서는 상대적으로 짧은 편이다. 그러나 늦봄은 간단한 비유와 상징으로 노동자의 어머니라는 그의 위상과 무게를 아주 적확하게 표현했다. 똥물 투척으로 아는 동일방직 여성 노동운동 뒤에 이런 분이 있었음을 이제야 알았으니 부끄러웠다. 그의 삶이 보여준 숭고한 헌신에 머리가 숙어졌다.


병걸 선생은 또 어떤가? 늦봄은 이미 써 놨던 시 <왜 여태 몰랐을까요>를 그에게 바치고 싶다고 했다. 시에는 ‘죽어서 푹푹 사그리 썩어야 흙이 되고, 농부와 창녀의 똥이 썩어야 겨레의 흙이 되고 민주적인 흙이 된다’는 자신의 깨달음이 드러나 있다. 이 내용이 ‘쓰러질 듯 쓰러질 듯 강하고 강한 사람, 김 교수’에게 해당한다며 이 시를 그에게 바치겠다는 것이었다. 해직 교수로 복직 기회를 버리고 재야에 남아, 드러나지 않게 늦봄의 곁을 지키며 통일 운동의 길을 간 김병걸 선생. 나는 시를 읊조리며 올곧음과 헌신의 표상 김 선생님과 이를 감사히 여긴 늦봄, 두 분의 서로에 대한 믿음을 생각해 봤다. <왜 여태 몰랐을까요>는 ‘사람이 없지만 사람을 찾을 수 있는 시’라 해도 될 듯하다.


늦봄의 시를 매개로 많은 분들을 새로 알고 깊이 알게 되었다. 큰 보람이었다. 이소선 여사, 김재준 목사를 찾아봤고, 전태일 기념관, 함석헌 기념관을 둘러봤다. 시즌2 초기 조성만 열사를 다룰 때 명동성당 35주기 추도식 현장에 직접 참석했던 것도 잊을 수 없다. 그런 경험을 좀 더 만들어야 했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조만간 찾아보고 싶은 사람과 장소가 적지 않다. 시즌2 마지막까지 연재를 이어간 건 옆에서의 격려 덕분이었다. 팀원들은 인물 선택의 폭을 넓혀도 된다며 나의 애로에 조언을 해줬다. 편집장은 <시 속의 인물> 기사를 단독 책으로 낼 수 있다고 부추겼고, 독자 입장에서 글을 수정하며 완성도를 책임져 주었다. 그렇게 스물세 번의 기사를 썼다.



글쓴이_만당
콘텐츠에 관심 많은 전직 광고인. 퇴직 후 자료의 디지털화 방법에 대해 궁리하다가 아카이브를 알게 되었고, 늦봄 아카이브에 빠져 자원봉사와 콘텐츠 제작에 열중이다.



● 아카이브에서 『월간 문익환』 2024년 4월호 <시 속의 인물: 김세진 열사> 기사 읽기

https://archivecenter.net/tongilhouse/archive/collection/ArchiveCollectionView.do?con_id=26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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