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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백살공주 Sep 23. 2024

파랑새를 쫒던시절

산새들아 미안해


초등학교 다니던 시절, 오월 중순만 되면 마치 연례행사처럼 산새 둥지들을 찾아 산을 헤매고 다녔다.  산이고 들이고 푸르름이 시작되면 나뭇잎을 먹는 벌레들이 지천이게 되고 그 벌레들들로 인해 모든 산새들이 왕성한 번식을 시작한다. 거의 모든 새들은 오월 중순쯤에 둥지를 틀고 알을 낳아 부화를 시키고 새끼들을 길러 내었다. 그때부터 산새들의 지저귐이 아주 심하다. 그때는 학교 가서 솔직히 공부하는 일보다 산과 들을 뛰어다니며 새둥지를 찾는 게 더 신나는 일이었다.

 

새들의 새끼를 보면 생명에 경이와 귀여움이 있어 새들의 종류를 불문하고 둥지에서 꺼내와 사육을 시도한다. 아주 진중한 사육사처럼 열과 성을 다하여 길러 보지만 거의 대부분 실패를 하게 된다. 그 경이롭고 가냘픈 생명의 불꽃을 꺼뜨려 애석한 아픔을 경험하면서도 결코 중단하지 않고 또 다른 둥지를 찾아서 헤매곤 했다. 어쩌다가 성공하여 솜털만 송송 나 있는 새끼를 네 마리를 둥지에서 꺼내와 지극한 정성으로 사육에 성공할 때면 그 기쁨은 최고였다. 새끼들이 자라나 날개를 어설프게라도 포로롱 거리며 이쪽에서 저쪽으로 날아가는 모습을 보면 정말 신난다. 내 어린 가슴에 밀려드는 경이의 희열감과 어떤 알 수 없는 성취감은 그해 가을까지 영향을 미쳤다.

 

나무 위에 둥지를 치는 때까치도 사육의 성공확률이 높아서 인기가 있었다. 노랑할미새나 할미새는 개천가 돌틈에 둥지를 트는데 무척 모습이 아름다운데 새끼들 안 고와서 길러 보지만 성공의 확률이 희박하였다. 큰 나무에 딱따구리 굴을 빼앗아 새끼를 치는 파랑새도 나는 길러보고 싶어 했으나 새끼를 내려와 본 적이 없다. 당시 파랑새를 태극새라고 불렀다. 날개를 펴고 날 때 날개밑에 하얀 태극문양이 선명하다. 지금도 파랑새 울음소리만 들려도 발길이 멈춰진다. 집 앞 아람 드리 소나무에서 매년 번식을 했던 새였고 철새였었다. 풀숲이나 작은 나무 위에 둥지를 트는 종달새나, 개개비, 굴뚝새, 또는 썩은 나무둥치에 굴을 파고 둥지를 치는 박새들과 곤줄박이도 다 성공률이 희박하기만 했었다. 그래도 나는 연구를 해가며 솜털만 송송한 새끼들을 내려다가 사육에 몰두하곤 했었다. 공부하는 일보다 신이 나고 경이로운 일이었다. 거의가 다 실패작이었다.

 

새둥지를 발견해도 접근을 못하게 높은 나뭇가지 끝에다가 둥지를 트는 노란색 꾀꼬리는 둥지를 발견해도 새끼들을 꺼내오기가 진짜 어렵다. 어떻게든 새끼를 내려오는 것만 성공하면 새끼를 키워내는 성공확률이 그래도 다른 새들보다 많았다.  멧비둘기는 대체로 소나무 높은 곳에 마른 나뭇가지들로 둥지를 짓는데 꺼내오기도 수월하고 새끼를 길러 날려 보내는 성공률도 높았다. 먹이도 곡식 종류여서 좋았다. 항상 둥지에 알 두 개를 낳아서 부화를 하는 새였다. 몇 번 길러서 날려 보낸 경험이 있었다.

 

붉은 배새매는 아주 높은 소나무에 둥지를 틀고 알을 네 개나 낳는데 당시 우리들은 [난춘이]라고 불렀다. 난춘이 둥지를 발견하면 가장 신이 나고도 좋은 일이지만 친구들에게도 대체로 비밀을 지켜야 했다. 잘못하면 친구들이 나보다 먼저 새끼를 꺼내갈 정도로 인기 있는 둥지였다. 누구든지 실패할 확률이 희박했기 때문이었다. 개구리가 주식이고 며칠만 정성을 들이면  스스로 개구리를 발톱으로 움켜쥐고 날카로운 부리로 뜯어먹기 때문이다. 가장 기르기 손쉬운 새였다.

 

맹금류여서 나무밑에서 둥지를 발견하고 아직 알인지, 부화가 되었는지 파악하기 위해 나무를 오르기 시작하면 어미새 암컷과 수컷이 교대로 위협비행으로 머리 위를 날카롭게 날아와서 머리를 까고 날아간다. 그럴 때면 나무를 꼭 않아야 안 떨어진다. 그것이 두렵고 무서워서 꼭 쟁이 넓은 모자를 쓰도 끈까지 단단하게 맨다. 만약 알이 부화되어 솜털의 새끼가 되어 있으면 쓰고 올라간 모자를 벗어 그 안에 새끼들을 담고는 조심스럽게 내려온다. 물론 두 어미의 날카로운 공격은 더 심해진다. 대체로 네 마리를 부화하기 때문에 두 마리는 남겨두고 오기도 했다. 그래도 두 어미는 집까지 따라오며 맹공을 하는데 머리에 닿지는 않는다. 나무에서 떨어질 뻔 한적도 여러 번 있었다.

 

무사히 데려와 사육을 시작하면 그때부터 친구들이 부러워하기도 하는데 그만큼 실패할 확률이 없는 새가 바로 난춘이었다. 그날부터 막대기 들고 논두렁을 휘젓고 다니며 개구리를 잡고 칼로 짓이겨서 먹이로 주면 아주 덥석덥석 잘도 받아먹는다. 20일 정도 진지하게 기르다 보면 솜털이 다 날개털로 바뀌고 제법 어른새 모양을 닮는다. 이때부터는 그냥 개구리를 잡아서 던져주면 발로 받아서 혼자 뜯어 먹는다. 그러면 이제 고생을 끝이다. 날기 시작하면 더 재미있다. 지붕 위에 날아올라 갈 때 기분은 정말 좋다. 학교에서 돌아올 때 손에 개구리를 잡아 들고 오면 놈이 지붕 끝에서 기다리다가 날아와 손에 든 개구리를 잡아채간다. 다른 사람 손에 든 개구리는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먹이를 주는 주인을 알아보는 것이다. 친구들이 부러워하면 어깨에 잔뜩 힘이 들어간다.

 

조금씩 날기 시작하면 노란색 리본 같은 것을 발목에 매어둔다. 집 주변 밤나무 가지에서 날아다니며 개구리를 받아먹다가 저 혼자 사냥이 가능하면 아주 집을 떠나 버리는데 나도 그때쯤엔 너무나 더운 여름이 되어 물놀이에 빠지게 되면서 그다지 서운함이 생기지 않는다. 원래 마음엔 집지붕 꼭대기에 살아주기를 희망하지만 난춘이는 여름철새라서 멀리 날아가 버린다. 이듬해 봄만 되면 발목에 노란 끈을 단 난춘이가 지붕 위를 날아오기도 하는데 곧 산으로 날아가 버린다. 그때 내 가슴에 흘러가는 안도의 희열들은 형언 할 수가 없을정도였다.

 

그렇게 사육을 성공하기 까지는 여러 시행착오를 하게된다. 물론 동네 형들에게 전수된 기술들도 있었지만 스스로 체득하는 것도 많았다. 난생처음 친구들 몰래 난춘이 둥지를 발견했을 때 얼마나 좋던지 콜롬버스의 신대륙발견 보다도 나의 난춘이둥지가 더 위대한 세계였다. 부화중인 알이 네개였다. 처음 혼자 발견했을 때 기대와 조급함과 또 어미들의 위협 비행이 두려웠다. 그래서 나는 알네개가 빨리 부화를 하라고 살짝 깨트려놓고 나무를 내려왔었다. 빨리 새끼를 내려다가 기르고 싶은 동심에서 조급하게 알을 살짝 깨 놓고 온 것이다.경험이 없어 기다리기가 싫었던것이다.

 

그리고 이틀동안 아무것도 하지못했다. 이미 내가 어미보다 일찍 깨 놓아서 삼일정도만 지나면 솜털이 뽀송뽀송하게 부화되어 있을것으로 생각하고 그 삼일을 기다렸다. 아주 지리한 삼일을 보내고 설레는 마음으로 둥지를 찾아간 나는 나무를 올라 가는데 어미새들이 위협비행이 없어 이상하기도 했지만 안도를 하고 둥지로 올라갔다. 앗뿔사, 깨진 알들속에는 작은 개미들이 까맣게 우굴거리고 있었다. 망연자실한 나는 아무것도 하지못했다. 인위적으로 깨진알들을 버리고 어미들도 떠났고 개미들의 성찬만 만들어준 꼴이었다. 그날 뒤로는 절대로 알을 내가 먼저 깨는일을 하지않았다.

 

그 일을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에 경험하고 나서 다시는 그런 실수를 하지않고 난춘이 둥지를 발견하면 부화되기를 끊기있게 기다렸다. 그때부터 희망적인 일에는 기다리는 것도 중요한, 기다림의 미학을 배웠는지도 모른다. 부화가 되고 나서야 새끼들을 집으로 데려와 더러는 실패를하고 더러는 성공을 하면서 산새들의 번식에 관해 육감적으로나마 제대로 알게 되었다. 그저 봄철만 되면 연례행사가 되어 갔지만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인이 되면서 자연스럽게 새들의 번식에 관심을 두지않게 되었다. 자연과 생명에 대한 남다른 호감이 많았던 시절이었다.

 

그 시절들이 정확하게 사십년전 일인데도 그때를 생각하면 그 산새들에게 미안해서 지금도 등에 식은땀이 흐른다. 새들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면서 마음과 손이 오골거릴 정도로 부끄럽다. 얼마나 못된 시절이었는지 부끄럽다. 이제 성인이되고 나이가 드니 생명은 작든 크든 미물이든 경이 그자체로도 존귀할 따름이다. 위안이다면, 알퐁소 도테의 마지막 수업에서도 생둥지를 찿아다닌 이야기가 있고 미국의 소설 내 영혼이 따듯했던 날들, 내용에도 새들이야기가 나온다. 사실 최고로 가난한 시절이었지만 내 명혼이 따듯하던 시절들이다.


오늘은 서울에서 보냈답니다. 청주에서 저녁에 술사주신다는 분이 계셨는데도 서울이어서  놓쳤답니다. 그 덕분에 일은 많이했답니다. 낼도 다시 서울에 옛날고객님들을 만나러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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