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재영 May 17. 2020

 장모님의 만둣국

9 남매의 막내 처남은 유복자다. 장모님은 밀양 삼문동에서 군 장교로 예편한 남편의 농약을 거들면서 자녀와 아웅다웅거리며 함께 단란하게 사셨다. 행복도 잠시 뿐 장모님이 아들을 기대하며 아홉째 아이를 임신하고 있을 때, 정정했던 남편이 덜컹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 버렸다.  청천벽력과 같은 사고 소식을 듣고서 장모님은 목놓아 울다가 기절을 하고 말았다. 하지만 남편을 그리워할 틈도 없이 바쁘게 살아야 겨우 9 남매에게 밥 한술 떠 먹일 수 있었고, 학교에 보낼 수 있었다.  때로 자녀들 문제로 이웃과 다투거나 한꺼번에 5명의 월사금을 내야 하는 것이 감당하기 어려울 때 아이들 몰래 서럽게 눈물을 흘리곤 했다. 먼저 간 남편을 원망하기도 했다. 그렇게 세월을 견뎌 오면서 시골에서 대학생이 귀하던 그 시절에 딸 4명을 나란히 부산대학교에 보냈다. 그때부터 장모님은 당당해지셨다. 풍채도 넉넉해지셨다. 똑똑하고 잘난 자식들을 둔 장모님을 동네 사람들은 부러워했다. 물론 자식들이 자신들의 미래는 오직 공부에 달렸다는 것을 일찍 깨달았던 결과다. 아홉 남매가 한방에서 자고, 식탁에  고등어이라도 올라오는 날이면 전쟁하듯 쟁탈전을 펼쳐야 생선 한토막이라도 입에 넣을 수 있는 가난에서 벗어날 길은 공부를 잘해서 대학에 가는 길 밖에 없었던 것이다.  일손이 바쁜 장모님은 눈에 띄는 아이에게 잔일을 시키고, 큰 딸들에게는 밀린 외상 돈을 받아 오라고 주문했다. 자식들은 집에 있으면 일을 해야 하고 외상값을 받으러 가야 하는 당혹스러운 심부름을 피하고자, 학교에서 늦게까지 공부하고 돌아오는 방법을 선택했다. 일요일에도 학교 공부하러 간다면서 아침 일찍 집을 빠져나왔다.     


자녀들이 장성해서 아들 딸들이 짝을 맺었다. 나는 넷째 사위다. 장모님은 해운대 아파트에서 혼자 사셨다. 그 많은 자식들 중에서 어느 누구도 장모님을 모시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모두 직장 다니고 바쁘게 살고 있는 탓이기도 하지만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장모님과 자녀들 사이에 살가운 애정이 없기 때문이다. 아홉 자녀의 어미로 세상과 가난과 맞서 살아오는 동안 장모님의 본래 곱던 심성이 투박해졌다. 많은 자식들 근사하려다 보니 개인별로 애정을 쏟을 수도 없었다. 정성이 부족했다기보다는 살아가는데 급급했을 뿐이다. 장사하랴, 매끼 식사 준비하랴, 외상 빚 받으러 가랴 시간이 늘 부족했다. 특히 위로부터 내리 여섯인 딸들은 아들과 차별하는 엄마에 대한 섭섭함으로 지금도 모녀간의 관계는 소원한 편이다. 맛있는 것이 있으면 남겨서 아들에게 주고, 딸들 몰래 아들만 불러내서 짜장면을 사주는 엄마가 미웠다. 그때 딸들도 정말로 짜장면을 먹고 싶었다.


그래도 장모님은 늘 대가족의 중심이셨다. 자녀들이 짝을 맺어 손주들이 하나 둘 늘어났다. 장모님은 좁은 해운대 아파트에 모이지 말고 야외로 함께 나가자는 제안을 하셨다. 그렇게 시작해서 충주 수안보 온천, 부곡 하와이, 김천 직지사, 대전 동학사와 엑스포 등을 함께 다녔다.  한 번은 밀양 석굴사에 1박 2일로 장모님을 모시고 모든 가족들이 흑염소 고기를 먹으러 갔다. 그 당시 나는 서울에서 직장 생활을 하고 있어서 토요일 저녁에 합류했다. 석골사 앞 민박집에 도착하자 먼저 오신 장모님이 염소 육회를 내오셨다. 간장, 다진 마늘과 약간의 참기름으로 버물린 육회를 채로 쓴 배와 함께 먹었다. 소 육회 맛과는 다른 특별한 맛이었다. 이어 저녁으로 염소 불고기와 염소 고깃국을 먹었다. 어린 조카들의 노래도 듣고 다 같이 게임도 하며 함께 즐겼다. 끝판에는 장모님과 사위들은 고스톱판을 벌렸다. 장모님은 고스톱의 고수이시다. 돈을 잃을 때보다 따실 때가 더 많았다. 그렇게 하루 밤을 보냈다. 다음날, 아침식사로 염소 뼈를 밤새 고아 만든 곰국이 준비되어 있었다. 겉절이와  함께 맛있게 먹었다. 정말 흑염소 한 마리를 고스란히 먹었다. 아침식사 후 민박집주인을 따라 천렵을 나섰다. 큰 해머  하나 어깨에 걸치고 계곡을 따라 산에 올랐다. 얼음이 언 계곡에서 큰 바위를 해머로 힘껏 내려쳤다. 바위 밑에서 겨울잠을 자든 개구리와 송사리들이 충격을 받아 물 위로 떠올랐다. 숙소로 돌아와 펄펄 끓는 기름으로 노랗게 튀겨 먹었다. 고소했다. 


명절 때는 해운대 장모님 아파트에 여섯 딸과 세 아들이 자식들을 데리고 왔다. 다들 명절의 기름진 음식으로 느끼해진 입맛을 깔끔히 씻어 줄 장모님의 만두를 기대하며 모여들었다. 장인이 강원도 군부대에서 근무할 적에 배웠다는 만두를 장모님은 삼문동에 살면서도 자주 빚어셨다. 매일 거친 음식을 물리도록 먹는 자식들에게 장모님은 별미로 만둣국을 끓여 주셨다. 자식들은 그 만두에 입맛이 들었고, 사위들도 가끔씩 먹다 보니 어느새 익숙해져 버렸다. 나도 처음 먹었을 땐 투박했던 그 맛이 차츰 중독이 되어 갔다.  어느새 장모님의 만둣국은 모두에게 그리운 명절 음식이 되어 버렸다.

명절날 가족들이 다 모이면, 의례히 거실에 비닐이 깔리고 만두 빚을 준비를 한다. 밀가루에 소금, 오일을 섞고 물을 부어가며 반죽을 만든다. 적당한 물 비율로 반죽이 되직해지면 장모님은 동서 중 하나에게 반죽을 넘겨주고 오랫동안 치댈 것을 주문하셨다. 치댈수록 반죽은 지고 쫄깃해진다. 한참을 치댄 반죽은 냉장고로 들어가 숙성과정을 거쳤다. 장모님의 만두 속재료는 김치, 두부, 부추, 숙주, 당면, 양파, 마늘이다. 이 중에 김치가 만두의 맛을 좌우하는데 주로 신 김치를 사용하셨다. 김치는 꼭 물끼를 짜고, 두부는 으깨고, 부추와 숙주와 양파는 한번 끓는 물에 살짝 데친 후 물끼를 꽉 짜낸 후 당면과 다른 재료와 함께 버물린다. 간장, 참기름, 소금과 후추로 간을 맞춘다. 이때 잘게 다진 청양고추를 빠트리지 않고 넣는다. 만두에서 얼큰 맛이 배어 나와야 명절 음식으로 느끼해진 입맛을 다스릴 수 있기 때문이다. 속재료가 다 준비되면 냉장고에서 숙성된 밀가루 반죽을 꺼내어 다시 한번 치댄다. 어린 조카가 반죽을 거실 바닥에 패대기를 치기도 하고, 올라가 반죽을 짓밟기도 한다. 그렇게 해서 반죽 속에 숨은 마지막 공기방울을 빼낸다. 커다란 스테인리스 대접을 뒤집어 넓게 편 탱탱한 반죽을 찍어 만두피를 만든다. 만두피에 준비한 속을 빼곡히 넣어 만두를 완성한다. 만두 크기가 보통이 넘는다. 멸치 육수로 끓인 만두 세네 개면 커다란 대접에 가득 찰 정도로 크게 빚는다. 긴 명절을 보내며 끊임없이 기름진 음식을 먹어 배가 부른 식구들은 모두 만두 한 그릇을 뚝딱 해 치웠다. 배가 불러도 장모님 만둣국 한 대접이 명절 음식으로 지친 입맛을 되살리기 때문이다. 처가에서 돌아올 때 아내와 처형들은 다른 것들은 그냥 두고 남은 만두는 꼭 싸들고 왔다.                                

 

몇 년 전부터 장모님은 논산에 있는 요양원에 계신다. 간호사와 요양사가 친절하고 공기 좋은 그곳을 장모님은 만족해하신다. 찾아 뵐 때마다 환한 웃음을 짓는 풍채 좋은 장모님이 작년에 미끄러지셔서 대퇴부를 수술하셨다. 그리고 몸 한쪽에 마비가 왔다. 지난번 생신 때에는 울음으로 반가움을 표시하더니 이번 명절 땐 폐렴으로 긴급 대기용 병실에 누워 계셨다. 그 좋던 풍채는 어디로 갔는지  살이 많이 빠지셨다. 틀니를 빼내 두 개 남은 치아로 하루 미음 한 그릇과 영양제로 연명하고 계신다. 왕성한 식성을 잊어버리셨고 몸은 왜소해지셨다. 들리지도 않는 작은 목소리, 입모양으로 '보고 싶었다'는 말씀을 하셨고, 보담이에게는 '시집가라'라고 하셨다. 그리고 '미경이는?' 하고 넷째 딸을 찾으셨다. 엷게  눈을 뜨고 잠시 바라보시다가도 눈을 감고 휴식을 취하셨다. 힘이 겨우신 듯 이불을 끌어당겨 잠을 청하는 듯했다. 작별 인사를 하고 자리를 뜨려는 순간에 의식을 모아 깊은 눈으로 오랫동안 우리를 지켜보셨다. 눈물이 솟아오르고 가슴이 저려왔다. 할머니 손을 도닥거리는 보담이도 눈물을 훔치며 먼산을 바라봤다. 아무런 연민도 없는 듯 아들 빛찬이는 휴대폰을 두드렸다.

 

장모님이 편찮으시기 전까지는 많은 식구들이 장모님 댁에 자주 모였다. 주 6일 근무로 토요일 오후에 출발해서 저녁에 만나는 가족 모임에도 다들 빠지지 앓고 참석해서 가족 간 우애와 재미를 함께 나누었다. 밤을 꼬박 새웠고, 20여 명이 넘는 식구가 큰 방 하나에서 쪽잠을 잤기도 했다. 그래도 즐거웠다. 장모님이 요양원에 계신 후로부터 자식들은 다들 사는데 바쁜지 얼굴 보기도 힘들어다. 만나는 횟수가 줄어들자 처가 식구나 동기간 우애도 줄어들었다. 만나도 전처럼 흥겹지 않다. 좋았던 그때가 그립다. 장모님의 만둣국이 그립다.


나를 포함하여 동서들과 처가 식구 모두 장모님의 만둣국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어릴 적에 자주 먹었던 음식은 평생 가서도 잊지 못하는 법이다. 오월이 가기 전에 아내와 함께 예전에 함께 빚어 만든 장모님의 만둣국을 재현해 보아야겠다. 만두피와 만두소를 만드는 비결을 속속들이 기억해내서 장모님의 만둣국을 만들고 맛을 되살려, 동서들과 처가 식구 모두를 초대해 나누어 먹고 싶다. 최재순 장모님의 후손들이 한 자리에 모여 지난날의 우애와 사랑을 다시 되살려 보는 거다. 그리고 만두 몇 개 싸들고 함께 논산 요양원으로 장모님을 뵈으러 가야지. 장모님도 당신이 평생 빚어 온 만둣국으로 입맛을 찾고 기운을 회복할 수 있지 않을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