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을 두고 온 곳에 남편을 데려갔다 (8)
*2016.10.04. Tuesday.
이 곳에서 제대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마지막 날이었다. 빈에서 만났던 동행들이 프라하에 도착하는 날이기도 했다. 마지막 날인데 저녁을 함께 하자는 연락에 좋다고 답한 뒤 오늘의 일정을 고민했다. 가족들과 친구들을 위한 선물을 사고, 마지막으로 또 한 번 프라하 성 근처의 스타벅스에 가서 여행을 정리하면 좋겠어. 프라하 투어 프로그램 중에 가장 유명하고 평이 좋은 팁 투어에도 참여해보자. 가보지 못했던 곳들에 들러보는 게 더 좋기야 하겠지만, 긴장할 상황을 만들고 싶지 않아 이미 몇 번이고 둘러봤던 루돌피늄부터 프라하 성을 둘러보는 오후 팁 투어 프로그램에 참여하기로 결정했다. 언제 다시 올지 모르는 프라하를 꼼꼼히 갈무리해두어야겠다 생각하며 몸을 일으켰다.
준비를 마치고 숙소를 나서 잠깐 걸었을 뿐인데 금방 익숙한 길이 나타났다. 낯선 곳으로 떠나온 여행에서 이렇게 금방 마음이 안정되는 반가운 길을 만들 수 있다니. 내 여행이 그만큼 같은 곳을 돌고 돌기만 한 부족한 여행이었다는 증명이기도 했지만 마음만은 편안했다. 굳이 많은 걸 보고 돌아갈 필요는 없지. 그러려고 떠나온 게 아니니까. 멀리 더 멀리 나아가든, 돌고 돌아 다시 같은 곳을 밟든, 어쨌든 나는 묵묵히 걷고 있다는 사실이 나를 위로했다. 걷다 힘들어도 멈춰 울기만 하지 않고 집으로 돌아가려는 과감한 결정을 내렸다. 마무리만 잘 하면 돼. 이미 선택한 것에 대해서는 후회하지 않기로 결심하며 걸음을 재촉해 까를교로 향했다. 전에 봐 두었던 액세서리 상점을 구경하고 친구들의 선물을 고를 생각이었다.
까를교 위에는 언제나처럼 많은 노점이 자리를 잡고 이곳에서만 살 수 있는 낭만을 팔고 있었다. 친구들의 몫으로 에스닉한 귀걸이를 몇 개 사고, 내 몫의 그림을 한 장 샀다. 여행하며 마트에서 요거트나 과일을 조금 산 것 빼고는 식비를 거의 지출하지 않아서 선물을 구매할 돈이 넉넉하게 남아 고르고 싶은 걸 마음껏 고를 수 있어 행복했다. 돈이 왜 이렇게 많이 남지, 이상하다, 계속 신기해하며 미리 생각해두지 않았던 회사 동기들을 위한 작은 선물도 몇 개 집었다. 마누팍투라에 들러 가족들과 친척들에게 나누어 줄 선물을 사면서는 다음에 여행을 가게 되거든 나를 위해 맘껏 쓰고 맘껏 먹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간절히 바라기도 했다.
선물이 든 봉투를 양손에 들고 스타벅스를 찾았을 땐 내가 가장 앉아보고 싶었던 프라하 시내가 내다 보이는 창 옆 자리가 남아있었다. 마지막 날의 행운이었다. 얼른 주문을 하고 자리에 앉아 따듯한 라떼 한 잔을 곁에 두고 한참 프라하의 전경을 감상했다. 안개가 잔뜩 낀 하늘에 일렁이는 주황색 지붕들. 흐린 하늘 아래 펼쳐진 프라하를 내려다보며 비행기 티켓을 끊었던 날을 생각했다. 무슨 생각으로 이곳으로 떠나왔더라. 목적이 있었던가. 누굴 잊어보겠다, 그런 생각을 했던가? 그때의 내겐 그럴 기력조차 없었던 것 같았다. 무얼 해보겠다고 온 게 아니라 도망친 거였지.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하지 않고 저지른 파혼으로부터, 거기서 시작된 불안으로부터, 내 불안을 구경하는 사람들의 동정으로부터 나를 빼내어 온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렇게 떠나온 곳에서는 나를 들여다봤다. 내 안에 혼재하는 불안과 외로움, 그럼에도 아직도 누군가를 사랑하고 싶어 하는 내 마음을 봤다. 가끔은 다스려지고, 또 가끔은 그렇지 못한 내 감정을 확인했다. 한순간이었지만 우울과 불안이 모두 사라진 듯 선명하게 내게 닿아오는 다른 감정들을 느끼기도 했다. 우울으로부터 해방된 그 잠깐 동안 경험했던 선연한 그 감각. 조금 더 나아진다면, 내가 지금보다 한 걸음만 더 나아간다면 그 날카로운 감각을 다시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언젠가 우울과 불안에 가려진 몽롱하고 흐릿한 즐거움이 아니라 나를 향해 훅 끼쳐오는 순도 높은 행복을 맘껏 들이마실 수 있지 않을까.
달라진 건 없었다. 며칠 여행했다고 나아질 거라면 그렇게 아프지도 않았겠지. 알고 있었기에 내가 여전히 불안하고 여전히 외롭다는 것이 슬프진 않았다. 기대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 그러나 그리 간절히 바라지도 않았기에 크게 실망하지도 않았다. 다만 나는 내 안에서 희망을 봤다. 끝없이 이어진 것 같던 어두운 굴의 끝을 더듬은 것도 같았다. 생각이 우울의 끝자락에 미치자 다른 것이 보였다. 여행을 떠나온 이후 처음으로 관계가 아닌 것에 대해 고민했다.
내 우울은 어디서부터 온 걸까. 어디서 출발해서 지금을 달리고 있는 걸까. 믿었던 사람의 배신이나 파혼이 내 마음에 깊은 생채기를 내고, 파묻혀있던 우울을 분출시킨 것은 분명했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내 속엔 늘 어찌할 바를 모르는 우울이 있었다. 내 삶을 어찌해야 할지 몰라 우물거리는 우울. 이 방향이 아닌 것 같은데, 더 이상은 이리로 걷고 싶지 않은데 계속 걸음을 재촉해야만 했기에 자라난 불안. 그것들은 내게 상처를 주었던 그 사람을 만나기 한참 전부터 나와 함께였다.
엄마는 내게 하고 싶은 게 참 많은 아이라고 말했다. 아니, 그건 틀린 말이었다. 내가 하고 싶었던 건 딱 하나였다. 노래. 나는 노래를 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형태야 아무렇든 무대에 서서 노래하는 삶을 사는 게 내 꿈이었다. 일곱 살 때부터 가수를 꿈꿨고, 그 꿈은 오래도록 변하지 않아 아직도 내 안에 남아있었다. 변한 것은 희망뿐이었다. 중학교에 가면 오디션을 봐야지, 대학에 가면 콘테스트에 나가야지, 하고 미래를 그렸던 나는 너무 늦어 포기할 때가 되었다는 사실에 눈물지었다. 내가 노래를 하고 싶다고 할 때마다 엄마는 나를 비웃었다. 너보다 노래를 잘하는 애들이, 너보다 예쁜 애들이 세상에 널렸어. 그걸 해서는 성공할 수 없어.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숨이 멎을 것 같았다. 나를 응원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것 같아 내 안의 내가 계속 작아졌다. 한 번 움츠러들어 사진가가 되고 싶다고 이야기했을 때도 엄마는 나를 비웃었다. 또다시 움츠러들어 더욱 작아진 내가 작가가 되고 싶다고 이야기했을 때 엄마는 내게 헛된 꿈에 빠져서 청춘을 낭비하면 안 된다고 말했다. 헛된 꿈. 내 꿈이 그런 거였나. 그게 그렇게 허황된 꿈인가.
가고 싶지 않은 길이었지만 성실하게 걸었다. 성실과 인내, 승부욕은 내가 가진 최고의 무기였으니까. 지금은 아마 그 어떤 일을 했더라도 그 무기로 어느 정도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어릴 땐 그런 생각조차 할 수가 없어서 주변에서 가라는 길을 갔다. 어른들이 그려준 길을 따라, 속도를 냈다. 남들보다 훨씬 잘 뛰었지만 그 사이 내 마음엔 불안이 쌓였다. 내가 하고 싶은 걸 하기엔 너무 늦었는데. 나와 같은 꿈을 꾸는 다른 이들은 이미 그 길을 걷고 있는데. 뒤쳐지는 것 같았고, 영원히 그들과 함께 걸을 수 없을 것 같아 슬펐다. 어찌할 방법이 느껴졌다. 내 우울은 여기서부터 비롯됐다. 꺾이지 않은 꿈. 오랜 시간이 지나도 바래지 않는 빛. 허황된 꿈을 품고 마지못해 현실을 살아내야 하는 삶.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겠다고 말하는 게 큰 잘못처럼 느껴졌다. 발목에 채워진 쇠사슬이 자신을 붙들었던 어릴 적의 기억 때문에 몸집이 커져도 달아나지 못하는 서커스 단의 코끼리처럼, 다 커서도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겠다는 말이 선뜻 나오지 않았다. 내가 꾼 건 허황된 꿈이라고 했으니까. 그런 데 빠져서 청춘을 낭비해서는 안된다고 했으니까. 다 자라서도 내 생각은 조금 달랐다. 청춘을 돈 몇 푼에, 안정성에 팔아먹는 건 정말 괜찮은 걸까. 내가 30살이 되어서, 40살이 되어서도 내가 꿈꾸는 일들에 도전할 수 있을까. 지금도 너무 늦은 것 같은데 그때는 정말 별 수가 없지 않을까. 나이를 먹어서도 내가 갖고 싶었지만 도전도 해보지 못한 꿈을 이루고 사는 사람들을 보며 계속 우울해하는 것이야 말로 정말 내 청춘을 좀먹는 일이 아닐까.
내 우울은 잔뜩 움츠러들어 제대로 자라지 못한 내 청춘에서 시작됐다. 내 마음이 완전히 낫는 데는 내 꿈을 돌보는 일이 꼭 필요했다. 마음에 들지 않는 내 삶의 경로를 바꾸는 것부터가 그 시작일 테였다. 다른 누군가를 사랑하고, 사랑받는 데 집중하지 말고 너 자신을 예뻐하고 충분히 사랑하라는 말이 그제야 와 닿았다. 나를 예뻐하기 위해서는 내 삶을 내 마음대로 꾸밀 수 있어야 해. 그게 시작이야.
더 이상 엄마를 탓하고 싶지 않아 마음을 다독이며 시간을 보내다 일어서서 숙소로 향했다. 선물을 대충 정리해두고 팁 투어에 참가하기 위해 약속 장소인 루돌피늄으로 향했다. 전문가의 설명을 들으며 다시 돌아보는 까를교와 프라하 성은 달랐다. 아무것도 모르고 그저 걷기만 했던 혼자의 여행에서 그저 외적인 아름다움만을 마주했었다면, 역사와 이야기를 곁들인 투어를 통해서는 건축물 안에 담긴 내밀한 무게감을 느낄 수 있었다. 프라하를 떠났던 며칠 전보다 한층 쌀쌀해진 날씨에 체온이 조금 떨어지는 듯했지만 마음은 가벼웠다. 투어가 끝나갈 때쯤 나처럼 혼자서 투어에 참가했던 여자분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 '혹시 혼자 오셨으면 저녁 같이 하실래요?' 이미 저녁을 함께하기로 한 동행이 있다고 하자 함께해도 괜찮은지 물어달라고 하기에 단체방에 메시지를 남겼다. 제가 오늘 투어 하면서 만난 분이 있는데 저녁 함께 하고 싶으시다고 한 번 여쭤봐 달라는데 괜찮으신지요. 답장은 긍정적이었다. 나라면 좀 고민했을 법도 한데, 다들 대단하다. 나는 아직 멀었구나, 하는 좌절감과 언젠간 나도 잘 모르는 사람들과 아무렇지 않게 식사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하는 기대감을 반씩 안고 약속 장소로 향했다.
저녁 시간은 즐거웠다. 엊그제 한 번 만났던 것뿐인데 얼굴을 마주하니 반가운 기분이 들어 신기했다. 구시가지 안의 아무 식당에나 들어가 꼴레뇨와 맥주를 시키고 먹는 둥 마는 둥 하면서도 사람들이 웃는 모습을 보니 나도 슬쩍 웃음이 났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주제가 각자 왜 이곳으로 여행을 떠나오게 됐는지에까지 흘러갔는데, 조금 고민하다가 파혼을 하고 너무 힘들어서 도망쳐왔다고 솔직하게 말했다. '아, 진짜? 마음고생했겠네.' 대수롭지 않게, 그러나 걱정하는 투로 대답한 빈에서 만났던 언니는 자연스럽게 다른 주제로 이야기를 옮겨갔다. 개운하기도 하고 찝찝하기도 한 애매한 기분에 잠깐 머물러 있다가 금세 다시 이야기에 합류했다. 오늘 투어에서 만났던 여자분은 일찍 숙소로 돌아가고, 나는 조금 늦게까지 남아 두 사람과 수다를 떨었다. 언니는 나와 사는 곳이 비슷하고, 동갑내기 남자애는 직장을 구하러 며칠 서울에 있을 예정이라 그때 또 한 번 모임을 가지기로 하고 헤어졌다.
숙소로 돌아와서는 내일 아침 일찍 공항으로 가기 위해 미리 짐을 쌌다. 내 것은 늘어난 짐도 줄어든 짐도 없이 그대로였고, 정리해야 할 건 선물로 구입한 것들이 전부라 금방 캐리어를 채우고 문을 닫았다. 돌아간다. 지는 것이 아니야. 정말 아니야. 그런 말을 되뇌며 잠이 들었다.
*2019.10.10. Thursday.
어제보다는 확연히 풀린 날씨에 마음과 몸이 가벼웠다. 어제 장을 보며 사둔 요거트로 간단히 아침 요기를 하고 겔레르트 언덕을 향해 걸었다. 며칠간 하도 걸었더니 살이 좀 빠진 것 같다 말하니 남편이 걸음을 멈추고 앞서서 걸어가는 나를 바라봤다.
'진짜. 또 살 빠졌어.'
'서울에서도 맨날 운동하는데 여행 와서 좀 걸었다고 왜 살이 빠지지?'
'걷기랑 근력 운동은 다르지. 지금 근육이 빠진 거지.'
'아깝네. 어떻게 붙인 건데.'
운동을 좋아하는 나와 남편은 결혼 이후에 조금 살이 붙긴 했어도 여전히 날씬한 몸을 유지하고 있었다. 일부러 식단 조절을 한다거나 하는 건 아니었고, 복싱을 좋아하는 남편이나 웨이트 트레이닝을 좋아하는 나나 아무리 먹는다 해도 살이 찔 틈이 별로 없었던 것뿐이었는데 여행 와서 좀 많이 걸었다고 살이 빠져버린 것이었다. 어쩐지, 옷 입을 때 헐렁하더라니. 그래도 이곳에 오기 전까지는 잘 모르던, 그리고 앞으로도 많은 부분을 모르고 평생을 살아갈 도시를 걷는 건 포기하고 싶지 않아 끝까지 걸었다. 언덕을 올라가는 길은 차들이 드나드는 완만한 경사로와 가파른 계단 길, 두 가지가 있었는데 돌아가는 것이 싫어 계단으로 올라가기로 했다. 돌아가면 열심히 단백질을 섭취하고 중량을 늘려 운동해야겠어. 결연하게 말하니 남편은 웃었다. '제 때 먹기나 해. 끼니 거르지 말고.' 늘 한 발 앞서 무리한 결심을 하곤 하는 나를 잘 아는 남편의 말이었다. 맞네. 제 때 챙겨 먹는 것부터 해야 되네. 끄덕이며 오르는 언덕은 높았다.
꼭대기에 올라 내려다보는 부다페스트의 풍경은 정말 예뻤다. 프라하나 빈처럼 몇 가지 톤으로 통일된 가지런한 아름다움은 아니었지만 훨씬 활기가 넘쳤다.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들과 강변을 달리는 차들을 보고 있으니 삶의 소리가 바람을 타고 들려오는 듯했다. 그리 높이 올라오지 않았는데도 발아래로 펼쳐진 시내가 손에 닿을 듯 가까웠다. 서울에서 이런 광경을 보려면 아마 남산 정도는 올라야겠지. 머리도 정리하지 않고 불어오는 바람을 그대로 맞으며 서울을 생각했다. 출근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아서인가. 돌아가면 또 회사로 향해야 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가라앉았다. 3년 전과 다름없이, 원하지 않는 삶은 계속되고 있었다.
일에서 삶의 의미나 보람을 찾는 건 바보 같은 일이라며 다른 즐거움을 찾아야 한다는 말에 운동이나 다른 취미로 내 관심사를 바꾸어 보려고도 숱하게 노력했다. 새로운 취미에 도전했고, 다양한 경험을 하기 위해 여기저기 여행을 다녔지만 내면의 목마름은 채워지지 않았다. 그런 식으로는 내가 원하는 내가 될 수 없었다.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회사에서는 그냥 돈이나 벌고, 남은 시간에 내 삶을 챙기라고? 회사를 다니면서 글을 쓰는 사람들도 많다고? 그렇게 시작하는 거라고? 깨어있는 대부분의 시간을 멍하니 흘려보내라는 말이야?
부지런한 편은 결코 아니었지만 의미 없이 시간을 보내는 건 정말이지 싫었다. 아까운 내 인생을 내 자신을 잃어버리는 데 쓰는 것도 싫었다. 마음이 힘들었을 때는 하고 싶다고 이야기했던 것마다 이건 이래서, 저건 저래서 안돼 하고 좌절감을 심어주었던 부모님을 탓하기 바빴지만 지금은 달랐다. 이제는 뭐에든 도전해야 해. 30살부터는 내가 원하는 삶을 살고 싶어. 적어도 40대엔 나 자신으로 살고 싶어. 그래서 뭘 할 건데? 하는 말에 그럴싸하게 답할 수는 없었지만 오래도록 고민해 온 일이었다.
남편에게는 몇 번이고 글을 쓰면서 살고 싶다고 이야기했다. 내가 처음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살고 싶다고 했을 때 남편은 '그래, 여보 글 잘 쓰잖아. 한 번 해 봐.' 했다. 결혼 후 TV로 방영되는 수많은 오디션 프로그램을 보며 춤추고 노래 부르는 내 모습을 보고는 지금이라도 노래를 하는 건 어떠냐고 했다. 일단 지금 열풍인 트로트로 시작해서 돈을 번 뒤에 하고 싶은 노래는 집에서 하라는 둥 농담 섞인 말이기는 했지만 어쨌든 내가 가고자 하는 방향에 대해 판단하는 말은 하지 않았다. 좋아하는 일이 직업이 되면 힘들다는데, 하고 걱정 섞인 말을 건네긴 했지만 그게 다였다. 내가 드라마를 써보려고 작가원에 지원해 합격하고 수업을 들으러 퇴근 후 여의도를 오갔을 때도, 공모전에 작품을 내보겠다며 한 달 내내 끙끙거렸을 때도 남편은 그 길에 대해 아무런 판단도 하지 않고 나를 응원했다.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이 잘 되었으면. 그래서 행복했으면. 되도록 상처는 받지 않았으면. 그게 남편이 바라는 전부였다.
힘들어도 견디고 계속 가야 한다고, 채찍질은 하지 않았지만 슬쩍 눈치는 주었던 부모님의 태도와는 달랐다. 남편은 나를 더 믿었다. 나만큼 성실한 사람이라면 뭐든 해낼 거라고 생각했다. 부모님이 가지고 있던 나에 대한 책임감과 남편으로서의 책임감의 무게가 다르기 때문일 수도 있었겠지만, 어찌 되었건 나는 남편과의 관계 안에서 훨씬 안정감을 느꼈다. 포근하고 따뜻했다. 눈치 보지 않고 내가 하고픈 일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있었다. 아무도 네 꿈은 헛된 꿈이라고, 그건 아니라고 도전도 하기 전에 나를 좌절시키지 않았다.
글을 쓰는 건 내가 불안과 우울을 덜어내는 데 아주 큰 도움이 됐다. 퇴근하고 짤막한 글을 쓰는 게 그렇게 재밌을 수가 없었다. 제대로 배우지도 않았으면서 무턱대고 드라마를 쓰고 공모전에 지원하는 한 달 동안 나는 살아있음을 느꼈다. 직장을 그만두더라도, 글로 돈을 벌 수 없더라도 매일 뭔가를 적어 내려갈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할 것 같았다. 대책 없는 생각이었지만 정말 그랬다. 글을 쓰지 않고, 노래하지 않고, 나를 표현하지 않는 게 오히려 나를 소모시켰다. 창의성이나 상상력을 발휘할 구석이라곤 요만큼도 없는 회사 일에 치여 매일을 무의미하게 흘려보낼 때보다 훨씬 많이 웃었다. 드디어 나다운 내가 되어가는 기분이었다.
'내년 이맘때쯤엔 퇴사를 하면 어떨까 해.'
'글 쓰려고?'
'응. 이런 거 저런 거 다 써볼래.'
'내년까지인 건, 최대한 버텨보려는 거야?'
'응. 혹시나 상황이 좋아질지 모르니까. 내년 이맘때까지 버텼는데 그렇지 않으면, 퇴사하고 글을 쓸래.'
'혹시나 나중에 후회하게 될까 봐 걱정이 되긴 하는데. 사회생활을 그만두고 후회하는 주부들이 많다고들 하니까.'
'지금 아무것도 안 해보고 이 시간을 흘려보내면 더 후회할 것 같아.'
'그건 그렇지. 난 응원해.'
강바람이 남편의 응원을 슥, 훑어다가 헝클어진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남편의 걱정도 이해가 됐다. 아기가 태어나면 누구누구의 엄마로 나를 잃고 살아야 하는 순간이 오겠지. 그때가 되면 나가서 무어라도 하고 싶어 질지도 몰랐다. 세월이 흘러 이제는 일을 하고 싶어 졌을 때, 그런데 막상 이런저런 이유로 내 자리를 찾을 수 없을 때 느낄 좌절감을 생각하면 슬프기는 했다. 그렇지만 미래에 찾아올지 그렇지 않을지 모르는 슬픔을 걱정하며 지금을 허비할 수는 없었다. 내게 부담이 될까 이야기를 꺼내진 않았지만, 남편의 이직이 성공한다면 반 정도 줄어들 그의 수입도 그가 쉽게 그래, 그까짓 거 그냥 때려치워, 하고 시원하게 대답하지 못했던 이유 중 하나였을 것이다. 갑자기 줄어든 수입으로 생활을 꾸려나갈 수 있을까. 막막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방도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내가 애들 가르치러도 다니고 그럴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자.'
'그런 건 걱정 안 했는데.'
'얼굴에 다 쓰여 있거든. 걱정스럽다고.'
'아닌데.'
강력히 부인하는 남편의 옆에서 나는 웃었다. 조금 팍팍해도 꿈을 뜯어먹고 사는 30대가 더 행복할 것 같아. 기지개를 켜며 혼잣말처럼 낮게 중얼거렸는데 남편이 용케 알아듣고 끄덕거렸다. 손을 잡고 완만한 경사로를 따라 언덕을 내려갔다. 점심엔 현지인이 자주 찾는 맛집이라는 퓨전 레스토랑을 찾았다. 헝가리의 대표 음식인 굴라쉬와 퓨전 립 스테이크를 시켜 나누어 먹고, 또 손을 잡고 걸었다. 짧은 산책 이후엔 나치와 소비에트 정권 시절의 역사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세웠다는 공포의 관을 관람했다. 시내 한복판에 위치한 전시관에 무어가 있겠느냐며 별로 기대를 하지 않고 들어갔는데, 편견이란 얼마나 쓸데없는 것인가에 대해 다시 생각해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세운 그 전시관 안에는 생생하게 기록된 역사가 있었다. 적나라한 과거가 있었다. 어떤 각오로 이 건물을 세웠는지, 그 절절한 마음이 전해져 오는 듯했다.
관람을 마치고는 마트에 가서 주변 사람들을 위한 선물을 샀다. 남편과 함께 떠났던 지난 리옹 여행에서 여러 종류의 과자를 사 와 소분한 뒤 지퍼백에 넣어 나누어 주었던 것이 큰 인기가 있었던 것을 기억하고 동유럽 것으로 보이는 과자들을 쓸어 담았다. 장 본 것을 삼등분 해 남편이 매고 다니던 가방에 조금, 두 사람의 양 손에 조금씩 들었는데도 꽤 무거웠다. 숙소까지는 30여분을 걸어야 했는데, 10분도 채 걷지 않아 팔이 아파왔다. 순간 여행 내내 보았던 전동 킥보드 라임 세 대가 보였다. 그래, 저거다. 저걸 끌고 가면 되겠다. 신이 나서 남편에게 제안했는데, 그는 어정쩡한 대답으로 거절했다. '어, 위험한데.' 그 말을 듣는 순간 뿔이 났다. 팔이 아파 죽겠는데, 이게 뭐가 위험하다고. 애들도 다 타는 게 뭐가 위험하다고! 신경질이 나서 '알았어, 안 탄다, 안 타. 아내 팔이 떨어지든 말든 가자.' 하고 몸을 휙 돌려 먼저 걷기 시작하자 남편이 그제야 '그럼 타고 갈까?' 하고 물었다. 이미 기분이 상해 엎드려 절 받기는 안 한다고 생떼를 피우다가, 그래도 몇 번 더 권하는 남편을 보고 마음을 풀었다. 앱을 다운로드하고, 카드 번호를 입력한 뒤 눈 앞의 라임 한 대를 선택했다. 들뜬 나에 비해 남편의 표정은 떨떠름했다. 난 이런 거 잘 못 타는데. 말끝을 흐리는 남편에게는 할 수 있어, 걱정 마, 내가 도와줄게, 하고 허세를 부렸다. 뒤늦게 등록을 마친 남편이 먼저 라임을 끌고 출발하고, 내가 뒤따랐다.
라임의 손잡이 한쪽에 무거웠던 장바구니를 걸고, 씽씽 달렸다. 바람이 시원했다. 손이 가벼우니 살 것만 같아! 신나서 더 빨리 달리고 싶었지만 앞에는 아주 느린 속도로, 천천히, 그보다 더 서행할 수는 없을 만큼 서행하는 남편이 가로막고 있었다. 나는 벨을 울려 남편을 불렀다. '여보! 왜 이렇게 천천히 가!' 놀리듯 던진 말엔 그게 자기가 낼 수 있는 최고 속도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깔깔 웃으며 따라가다가 사람이 없는 곳에서 남편을 앞질렀다. 바람이 불고, 신나. 씽씽 달리다 뒤를 돌아보니 남편이 배꼽을 잡고 웃으며 내 사진을 찍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왜 저래? 갸우뚱 거리며 숙소에 도착해 뒤따라오는 남편을 기다리고 있으니 한참 뒤에야 남편이 여전히 웃는 얼굴로 도착했다.
'여보. 뒤에서 보니까 너무 웃기다.'
'뭐가? 뭐가 웃겨.'
'아니, 그 무거운 장바구니 들고도 중심 잡고 잘 가는 거 너무 멋있고 귀여운데,'
'근데.'
'근데 여보 너무 작아서 라임을 부축하고 가는 것 같아.'
말을 마친 남편은 또 한참을 웃었다. 지금 누구 놀리나. 키 작다고 놀리는 거야? 뭐가 그렇게 웃기는지 눈물까지 흘리며 웃어대는 남편을 데리고 겨우 숙소로 들어왔다. 짐을 정리하고, 오늘도 할 일이 있다며 책상에 노트북을 펴고 앉은 남편의 뒤에 대자로 누워서 헝가리에서 쓴다는 배달 앱을 뒤적거렸다. 저녁으로는 이 동네 햄버거 배달시켜 먹어보자. 남편이 좋은 생각이라며 고개를 끄덕이는 걸 확인하고 바로 주문을 넣었다. 인터넷으로 찾아보지도 않고 오직 직감에만 의존해 시킨 햄버거는 맛있었다. 숙소에서 이름 모를 햄버거를 먹어도 즐거운 여행. 아무래도 좋은 여행. 그게 우리의 여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