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생사의 갈림길이었던, '출산'의 여정

'순산'은 당연한 것이 아니었다… "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by 김이플


요즘은 비혼도 많아지고, 비출산 딩크도 많아졌지만

여전히 아기를 기다리는 부부들도 많고, 수는 줄었겠지만 임산부들도 많다.


임신을 하면 당연스레 겪게 되는 출산의 과정.

초산이든, 경산이든 임산부에게 있어 출산은 늘 설레면서 한편 두렵기도 하다.

그 양쪽의 감정을 가지고 여자들은 출산을 준비한다.


블로그, 유튜브, 인스타그램 등 인터넷을 뒤지면

정말 숱한 출산후기들이 올라와있다.

조산기로 침대 위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야 했던 임신 기간동안

글로도 영상으로도 그 숱한 출산후기들을 보며 이미지 트레이닝을 했다.


병원에 가면 이렇게 주사를 맞을 땐 자세를 어떻게 취해야 하고,

진통이 올 땐 어떤 자세를 취하는 것이 좋고, 힘은 어떻게 줘야 하며.. 아기가 이렇게 태어나는구나..

머릿속에 수도 없는 그림을 그렸다.


하지만 사람 일이라는 것이, 생각처럼 되지 않는다.

인터넷 어느 구석에서도 보지 못했던 출산기를 겪게 되었다.




"기억나지 않는 아기 탄생의 순간, 왜이렇게 억울한 거야?"


37주 무렵, 배는 무겁고 각종 이벤트에 심신도 지치고 아기도 궁금한 마음에

"언제 나올래" 타령만 하고 있던 찰나.. 양수가 터졌다.

이것이 양수인지 나도 모르게 나온 소변인지 구분도 못 하는 초산모.

병원에 도착해 양수 검사를 진행하니 양수가 맞다고 하고, 그대로 출산 준비에 들어갔다.


임신 중기부터 그렇게 조산기로 엄마 고생시키던 아가는

정작 양수가 터졌는데, 별다른 신호는 없었다.

그렇게 수액만 맞으며 시간이 흐르고 결국 아기를 위해 배를 갈라야 하는 선택을 해야했다.


30분에서 한 시간이면 될 거라던 수술 시간은

2시간, 3시간이 넘게 지나고.. 대낮에 들어가서 밤이 되어야 회복실로 돌아올 수 있었다.


오후 3시 30분에 수술이 시작되고, 아기는 10분도 채 되지 않아 꺼내졌다고 한다.

오후 3시 39분 출생이었다.


양수가 터지고 너무 오래 지체되어 아기도 힘들었는지, 바로 울지 못하고

청색증에 심장 이상 등으로 곧장 신생아중환자실로 보내졌다고 한다.


엄마는 기억도 못하는 탄생의 순간에 생이별까지 해야했다.


참.. 그렇게 길고 험난했던 10개월에 배 가르는 고통까지 견뎌야 했던 아기 탄생의 순간을

내가 기억할 수 없다는 것이 세상 그렇게 억울할 수가 없었다.


내가 그렸던 아기 탄생의 순간은,

힘겨운 진통 끝에 아기가 태어나고 내 가슴 위에 안겨지는 뜨거운 아기의 체온.. 그런 모습이었는데 말이다.


아기는 그렇게 중환자실로 옮겨지고,

나는 아기를 꺼냈던 자궁을 다시 닫아야 하는데

출혈이 멎지 않아 심각했던 상황인 것 같았다. (전신마취로 기억나지는 않는다.)


정말 너무너무 아픈 고통으로 힘겹게 눈을 떴는데

온 세상은 그냥 하얀 빛이었고, 시끄러운 소리들이 들렸다.

그와중에 아기 생각이 났는지 옆에 누가 있는지도 모른채 아기를 찾았다.

옆에 있던 의료진은 아기 잘 나왔다고 괜찮다고 해서 안심했는데

아기도 어려운 상황들이 있었다는 건 뒤늦게 알게 되었다.


그렇게 다시 눈을 감고, 나는 다른 수술장으로 이송이 되었다.

자궁동맥색전술을 시행하는 수술실이었다.

허벅지 사타구니쪽으로 관을 연결해서 어찌저찌 출혈을 잡는 시술이라고 한다.

자궁동맥색전술은 하반신 마취로만 진행을 했는데

전신마취 후유증인지 과다출혈 후유증인지 눈은 뜨지 못하고

귀만 조금 열려있었던 기억이 난다.


당시 수혈을 받으면서 시술을 받았는데 계속해서 피가 모자라다는 의료진의 목소리가 들려

"애 낳다가 이대로 잘못되는 건가" 싶어 너무 두렵고 무섭기만 했다.


그와중에 엄마 포스 풍기는 담당 교수님의 이야기.

"내가 있는데 뭐가 무서워 두려워 말아요, 조금만 참으면 돼요

이 한 마디가 날 안심하게 했다.


한참 뒤에 전해들은 이야기로는

같은 시기 병원에 입원했었던 병원 동기 언니의 담당 교수가 했던 이야기다.

코로나19 시국에 정말 대학병원이라도 병원에 수혈용 혈액이 부족할 때가 많은데

나는 정말 그 때 혈액이 있어서 수혈을 받고 살아난 것은 기적이라고 했다고 한다.


당시 피가 부족해서 수혈을 받지 못했다면.. 아마 상상할 수 없는 상황이었겠지..?



색전술까지 마치고, 의식이 돌아온 뒤 회복 과정도 정말 고난의 연속이었다.

수혈 부작용으로 피부 알러지도 올라오고,

무엇보다 염증수치가 너무 높아져서 2주 넘는 기간을 고열에 시달렸다.

덕분에 퇴원도 늦어진..

염증수치 정상이 0~1 사이인데, 내 수치는 11이었다.

먹는 항생제에 더해 항생제 주사까지 시간별로 맞아가며 치료를 받았다.

(덕분에 우리 아가는 모유를 단 한 방울도 먹어보지 못했다.)


아기를 낳고, 2주간 입원을 했는데

아기는 딱 한 번 면회가 가능했다.


의식을 회복하고, 소변줄을 빼자마자 아기를 보겠다는 일념 하나로 몸을 일으키고

4층 모자센터에서 11층인지 12층인지 신생아중환자실까지 땀 뻘뻘 흘리며 올라갔는데

내 면회 예정시간에 응급 아기가 들어와서 면회가 불가능하다고 했다.

그렇게 한 번 빠꾸당한 면회로, 이틀 뒤에야 면회가 가능했다.

일주일 만에 아가를 만난 것 같았다.


"또복아"

사실 잘 실감이 나지 않았다.

이 아기가 내 아기라고?


솔직한 심정으로는, 내가 태어나서 이렇게 아픈 건 처음인데

무언가 원망의 화살이 아기한테 살짝 가기도 했었는데.. 이건 그냥 지나가는 바람이었다.


한 번 보고오니 너무너무 보고싶어서

매일 아침 소아과 교수님 전화 회진시간만 기다리고,

간호사 선생님이 보내주시는 사진만 계속 보면서 회복의 시간을 보냈다.


염증수치가 2~3 수준으로 내려오고, 고열도 미열수준으로 잡힌 뒤에

퇴원하고 조리원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렇게 아기 낳고 집에 오니.. 거진 한 달이 지나있었다.




이렇게 생사의 갈림길에 서 있었던 출산의 여정,

그리고 회복의 과정들은 험난했지만, 아기는 그 모든 과정을 무뎌지게 하는 힘이 있는 것 같다.


2년이 지난 뒤에 브런치에 다시 남기는 출산후기지만,

아직도 어제 일처럼 생생하고 개인적으로 트라우마처럼 남아있다.


대부분의 많은 산모가 대체적으로 '순산'을 하는 건, 절대 당연한 일이 아니라는 말을 남기고 싶다.

당시 모자센터 간호사 분은

"순산하는 산모들이 많을 것 같지만, 의외로 환자분처럼 힘든 과정 겪는 분들도 정말 많다."고 했었다.


결과적으로 지금 나는 건강하고, 아기도 건강하니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싶다.


당시 의료진 분들에게,

그리고 내게 누구의 피가 수혈됐는지는 알 수 없지만 헌혈 해주신 모든 분들에게 감사할 따름이다.

기적으로 살아난 만큼 예쁘게 아기 잘 키우고, 열심히 살겠다고 다시 한 번 다짐해본다.


감사합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너를 다시 만나기까지, "아가야 반가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