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성'이라는 함정
중학교 때부터 얼추 셈을 해보니 적어도 서른 번은 넘게 새해 계획을 세웠던 것 같다. 다이어리 첫 장에 비장하게 적어 내려간 목표들. 하지만 12월이 되어 돌아봤을 때, 그 목표를 온전히 달성했다고 느낀 적은 내 기억에 단 한 번도 없었다.
2026년을 준비하며 작년을 회고하다가 문득 서늘한 사실 하나를 깨달았다. 작년 다이어리에 적힌 목표들은 '나'의 소망이 아니었다. 그것은 '관성(Inertia)'이 써 내려간 문장들이었다.
물리학에서 관성은 물체가 현재 상태를 유지하려는 성질을 말한다. 움직이던 물체는 계속 움직이려 하고, 멈춰 있던 물체는 계속 멈춰 있으려 한다. 외부의 힘이 가해지지 않는 한. 우리 삶에도 똑같은 관성이 작동한다.
작년에 세웠던 목표를 올해도 쓰고, 남들이 하는 걸 나도 따라 적고, 사회가 '좋다'라고 정의한 방향으로 계속 나아가려 한다. 진짜 내가 원하는 건지 멈춰서 묻지 않은 채. 그저 작년의 속도, 남들의 방향을 그대로 따라가는 것. 이것이 관성이다.
관성의 가장 무서운 점은 '움직이고 있다는 착각'을 준다는 것이다. 분명 목표를 세우고, 다이어리를 사고, 첫 주는 열심히 하는데 왜 변하지 않을까? 그것은 내 의지로 움직인 게 아니라, 관성에 실려 굴러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흔히 "지금과는 다른 삶을 살고 싶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정작 목표를 들여다보면 그 '다른 삶'에 대한 정의가 빠져 있다. 내가 현재 어떤 상황인지, 내가 진짜 원하는 감각이 무엇인지 정의하지 않은 채 남들이 좋다고 하는 도구들만 가져온다.
이런 기술적인 조언들은 넘쳐나지만, 정작 이 계획을 세우는 '나'라는 주어는 소외되어 있다. 현재의 나를 반영하지 못한 계획은 몸에 맞지 않는 옷처럼 불편하다. 그러니 잊히거나, 포기하게 되는 것은 나의 의지 부족 탓이 아니다. 애초에 설계가 잘못된 것이다.
가장 의문이 들었던 것은 시간의 단위다. 왜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듯 1월 1일부터 12월 31일까지, 딱 '1년' 단위로 삶을 재단하려 할까?
1년은 기업의 회계 연도이거나, 농경 사회의 수확 주기일 뿐이다. 개인의 성장은 비선형적이다. 어떤 변화는 3개월 만에 끝나고, 어떤 정체성은 3년이 걸려야 만들어진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내가 다른데, 1월에 세운 계획이 11월의 나에게 유효할 리 만무하다.
'1년'이라는 사회적 강박, 그리고 남들만큼은 해야 한다는 '불안'. 이 두 가지가 결합할 때 우리는 관성적인 목표를 세운다. 영어 공부, 다이어트, 독서... 남들이 다 하니까 나도 해야 할 것 같은 숙제들이 내 욕망인 척 위장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관성을 끊어내고 진짜 나를 위한 계획을 세울 수 있을까? 스스로에게 몇 가지 질문을 던져보며 나는 '가짜 욕망'을 걸러내는 기준을 세웠다.
첫째, 뺄셈의 계획을 세운다 (Not-To-Do List).
관성은 자꾸 뭘 더 하라고 부추긴다. 이를 끊으려면 정반대로 가야 한다. 올해 '절대 하지 않을 것'을 정하는 것이 내가 원하지 않는 삶을 쳐내는 가장 확실한 칼날이다.
둘째, 동력의 원천을 확인한다.
이 목표를 생각했을 때의 감정이 '불안'인가, '호기심'인가? "이걸 안 하면 도태될 거야"라는 생각이 든다면 그것은 관성이다. 반면, "이걸 하면 내가 어떻게 변할지 궁금해"라는 생각이 든다면 그것은 진짜 욕망에 가깝다.
셋째, 아무도 모른다 해도 할 것인가?
타인의 시선, SNS의 좋아요, 사회적 인정이 모두 사라진 세상. 오직 나만 아는 성취라 해도 이것을 하고 싶은가? 타인의 시선을 제거했을 때 남는 것이 진짜 나의 정체성이다.
예를 들어 영어 공부를 생각해 보자. 해외여행도 가지 않고 업무에서 쓸 일도 없는데, 그냥 '해야 할 것 같은' 느낌 때문에 목표로 적진 않았는가? 그것이 바로 관성이다.
지금까지 나의 실패는 목표 달성에 대한 노력이 부족한 게 아니라 남의 지도를 보고 길을 찾으려 했기 때문이었다.
이제 나는 '무엇을 해치울까(To Do)'를 적기 전에 '어떤 상태로 살고 싶은가(To Be)'를 먼저 적는다. 1년이라는 긴 호흡이 버겁다면 당장 다음 달, 혹은 이번 분기만 생각하기로 했다.
관성을 걷어낸 자리에 남는 것은 아주 사소하고 개인적인 욕망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사소한 것이야말로, 30번의 실패 끝에 비로소 찾아낸 나의 진짜 나침반이 될 거라고 생각한다. 제발 올해는 목표를 달성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