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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은 왕

by 이은

꿈은 마치 영감 같다. 마트에서 물건을 담다가 잼을 보고 번뜩 생각나는 어린 시절이며, 미처 다 꺼내지 못 한 카펫 아래의 장난감이다. 생각 없이 걷다가 밟기라도 하면 눈물 찔끔 나오는 고통을 준다. 하지만 그 감각을 기억하는 이는 카펫 위를 걸을 때마다 조심하게 될 거다. 강아지에게 실험했던 벨소리와는 조금 다르다. 꿈은 질서가 없다. 불규칙적이며 개연성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다.


꿈은 내가 기억하는 자리에 장난감을 놓지 않을 거다.


그런 예측불허의 말괄량이 같은 아이를 우리는 그림자 속에 숨기고 다닌다. 내게도 그 아이가 있으며, 언제 나타날지 기회만 노리고 있었다. 나를 깜짝 놀라게 할 수 있는 절호의 찬스를.


최근 OTT에서 방영되는 드라마 <더 크라운>을 보며 감명 깊었던 부분들이 있었다. 그중 하나는 노쇠한 총리의 시선이었다. 그는 자신의 80세 생일을 맞이하여 어느 화가에게 자화상을 맡긴다. 그림을 그리는 내내 자신이 얼마나 잘 났는지에 대해 열심히 설명했지만 마지막 날에 가서야 화가는 그에게서 진짜 얼굴을 보게 된다.


자화상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공개되었을 때 그는 상당히 마음에 들지 않은 표정으로 그림을 노려봤다. 위의 장면은 그가 격분하여 화가와 단 둘이 있을 때 폭언을 날리는 장면이다. 저 때 화가의 대사는 투사라는 개념을 잘 설명해 주었다.


수많은 씬 중에 왜 하필 저 장면이 마음에 와닿았을까?

나 또한 내가 부정하는 어떠한 모습이 있는걸까.라는 생각에 다다르고 나니 어떤 꿈 하나가 떠올랐다.


24년 12월의 꿈.

나는 남자와 어디론가 여행길을 떠난다.
가는 방식이 좀 특이하다.
나는 자전거를 타고, 남자는 버스를 운전하며 간다.
눈앞에 지도가 훤히 보이며 남쪽이 더 좋긴 한데 그냥 이쪽으로 가도 좋다.라고 생각한다.
나는 앞장서서 가며 남자에게 길을 안내한다.

우리는 식당에 도착한다.
외진 곳에 있는 평범한 한식집이다.
식당 앞의 벤치에 언니와 남자가 나란히 앉고, 나는 맞은편에 혼자 앉는다.

남자는 나에게 너는 참 '이기적'이라며 모진 말을 쏟아냈다.
나는 서운한 마음에 남자에게 말한다.
너는 참 둔하네. 내 노력도 몰라주잖아.

이 꿈에서 주목할 점은 남자의 말이다. 너는 참 이기적이라는 말.

그가 나에게 그런 모진 말을 쏟아낸 이유는 무엇일까?


힌트는 여행길을 가는 수단에 있다. 나는 자전거로 혼자 자유롭게 다니며 삼거리에서 길을 갑자기 꺾어 버스 앞을 아슬아슬하게 지나 앞장선다. 남자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내가 이기적인 사람으로 보일 수밖에 없다. 자신은 버스에 수많은 생명과 짐을 태우고 다녀야 하는데 나는 남자의 상황을 알아주지 않는다. 되려 내 노력을 모른다며 큰소리를 치고 있다. 평소 했던 내적갈등이 꿈에서 불협화음으로 여실히 드러났다.


지금 내가 주의 깊게 봐야 할 것은 꿈속 자아의 태도다. 그렇게 보는 너의 시선이 잘 못 된 거다.라고 하지만 이게 현실이 아닌 꿈이라는 점에서 나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


남자가 나의 아니무스라면, 내 안의 어떤 재료가 남자로 투영된 거라면. 무의식 중에 스스로를 그렇게 보고 있다는 것이 된다. 하지만 꿈속 자아는 받아들이지 못했다.


내 안의 끊임없이 저항하는 태도는 인간이 추구하는 성장, 갱신의 목적에 반하는 행동을 추구한다. 마리-루이제 폰 프란츠 <민담의 심리학적 해석>에 나온 구절을 참고하자면


자아-태도가 이미 너무나도 경직되어 갱신의 가능성이 완전히 차단된 경우가 있다. 나는 그러한 사람들에게 자주 다음과 같이 말한다. 당신들은 의사에게 가서 치료해 달라고 부탁을 하면서 소변검사만은 사적인 것이니까 안 된다고 말하는 사람들과 같은 태도를 가지고 있다고. 많은 사람들이 이런 식으로 행동한다. 그들은 분석에 가지만 중요한 정보는 자신의 호주머니 속에 가지고 있다. (생략) 그러한 행동의 본보기에서 당신은 갱신에 저항하는 "늙은 왕"(그는 개인에게는 의식의 중심을 의미한다)을 알아차리게 된다.
-p85



마리-루이제 폰 프란츠는 왕이라는 자리, 그가 상징하는 것은 심리학 유형의 여러 기능 중의 주기능이 아닌 원형적인 토대라고 봤다. 그는 결국 늙고 말며, 많은 원주민 사회에서 왕이 성불능이 되거나, 병들면 죽임을 당하고 다른 왕으로 대체된다고 한다. 이해와 접촉의 지속적인 갱신을 필요로 하는 '자기 상징'인 것이다.


이렇듯 내 안에 병들어 있는 어떠한 모습이 죽어야만 새롭게 성장할 수 있는데 드라마 속 총리는 자기 자신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었다. 뇌졸중이라는 병을 숨기고 '총리'라는 직함을 다른 이에게 내어주지 않는다. 그가 고집하는 것은 자리뿐만이 아닌, 자신만의 신념이었다. 자신이 중요시 여기는 일들은 시대와는 맞지 않았다. 다른 이들이 문제가 될 것을 미리 예상하고 있던 부분을 보지 않으려 하고, 필립 공작이 비행을 하는 취미가 생겼다는 것을 최우선으로 둔다. 이로 인해 영국은 뿌연 연기로 뒤덮여 애꿎은 사람들만 목숨을 잃어야 했다.


이러한 문제는 그가 스스로 자리를 내려오거나, 강제로 빼앗지 않는 한 비슷한 패턴으로 더 큰일이 벌어질 수 있다는 위험을 야기한다. 영국에서 일어나는 일을 여왕에게까지 전달할지에 대한 선택은 총리의 손에 있었다. 그의 ‘덮는 손’은 필연적으로 연기로 뒤덮인 세상을 만들게 된다. 노쇠하고 쇠퇴한 그에게 남은 것은 자신이 초래한 상황을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가는 비겁한 잔머리뿐이었다. 하늘의 뜻이라는 책임전가의 말로 화룡점정을 찍는다.


나 또한 그 위기에서 예외일 수는 없었다. 내게 일어나는 많은 일들을 면밀히 살펴봤을 때, 언제나 내 감정이 우선이었고, 나 중심의 사고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었다는 점을 받아들여야 했다. 만일 이 꿈을 꾸지 않았더라면 더 늦게 알아차렸을 거다. 그때는 이미 암흑기에 도달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나는 어쩌다 이기적인 인간이 되었나.


어릴 적 나의 무덤이라 의미 부여했던 주택에는 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이미 죽어서 열매도 맺지 못하는 그야말로 재수 없는 나무였다. 언제부터 죽어있었는지, 왜 죽은 나무를 그대로 두고 있는지에 대해 궁금해하지 않았다. 하지만 어떠한 일의 계기로 나는 나무에 대한 애착이 생겼다. 내 무덤은 사실상 그 나무이며, 처형대였다. 깊은 상처의 상징으로 남게 된 나무는 우리 가족이 이사 가고 새로운 지붕으로 덮여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사라졌지만, 여전히 내 안에 살아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나무의 나약함으로 살 수 있었다. 높고 굵직한 나무였다면 아마 나는 그날 짧은 생을 마치고 우리 가족의 아픈 상처의 상징으로 남았을 거다. 그 일은 내게 착한 아이 콤플렉스를 만들었고, 스스로에 대한 끝없는 연민을 낳았다.

그날 죽은 것은 ’순수한‘ 나였다. 민담을 가져오자면 왕의 세 아들 중 가장 나약했던 ’ 바보 왕자‘의 부재가 발생된 거다. 바보 왕자는 자신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았고, 지하로 내려가 두꺼비에게 있는 그대로 요구했다. 주어진 상황에 착실히 임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으며 바보 왕자만이 건강한 여성성과 연결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해냈다.


나에게는 그런 역할을 해줄 바보 왕자의 기능이 그 나무 아래에 묻혀버렸다. 순수함을 잃고, 상황을 삐뚤게 바라보는 면이 생겼으며 끝없는 자기 연민은 다른 사람을 헤아리는 눈을 가리고 말았다.


헤아리는 일은 엄청난 에너지가 소모된다. 그만큼 상대에 대한 애정이 없다면 할 수 없는 일이다. 내 안에 애정이 없으니 바깥으로 보이는 모습은 이기적일 수밖에 없다.


이제는 인정해야만 한다. 착한 아이 콤플렉스는 더 이상 내 안에 없는 이야기다. 그건 사람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 지어낸 또 하나의 가면이었다. 예전에는 정말 그런 면들이 존재했을지언정 지금은 아니다. 어쩌면 누군가는 그런 가면을 쓴 적도 없었다고 주장할지도 모른다.

언제나 피해자일 수만은 없다. 때로는 가해자가 되어 고개를 숙여야 하는 일도 있었을 텐데 겸허히 받아들이는 태도가 생략되었다. '이기적인' 나의 모습을 제대로 봐야만 한다. 내가 한 배려가 과연 다른 사람이 필요로 했던 것이었을까? 되려 불편하게 만들지는 않았나? 과한 오지랖으로 상처를 주지는 않았나? 죽은 나무처럼 나약한 나를 봐야 한다. 그 나약함 속에 의외의 성장이 있을 거다.


자기 객관화가 되지 않고 늙기만 하는 것은 나뿐만이 아니라 주변을 죽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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