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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산 시마탄에서 배운 것, 어긋나도 괜찮아

16. 운무에 숨은 시마탄, 아쉬워도 후련하게-다리 창산(2)

by 리우화


중국 다리의 명산, 창산. 해발고도 4122m에 이르는 고산이다. 자연경관이 수려하고 역사·문화적으로도 의미가 깊다. 봉우리만 19개 이상이며 중국 소수민족 바이족(白族)에겐 성산(聖山)으로 여겨져 전통 축제나 제사에도 자주 등장한다.


창산에 오르는 길은 크게 세 갈래다. 감통사(感通寺)와 최고봉이 있는 시마탄(洗马潭) 그리고 중화사(中和寺)다. 대부분 감통사 케이블카를 타고 창산에 올라 중화산까지 등산을 하고 하산하는 루트를 따른다. 등산 시간은 개인마다 다르나 약 2~3시간 소요된다.


시간이 부족했던 나는 감통사 케이블 카를 타고 올라 시마탄 정상을 보고 내려가는 루트를 택했다. 보통 감통사에서 올라 중화사까지 트레킹하는 일정을 따른다.
리우화의 막간 타임 : 감통사 케이블카(운유옥대로 입구와 가장 가까움, 난이도 낮은 산책+풍경 감상에 적합, 소요시간 20분) / 시마탄 케이블카(시마탄 호수와 창산 가까이 올라감, 입장료가 가장 비쌈, 소요시간 30분)/중화사 케이블카(하이킹 루트와 연결됨, 가벼운 트레킹에 적합, 소요시간 20분)



창산 아래 비구니사찰 지자오안에서 절밥을 먹고 감통사 케이블카를 타러 내려갔다. (관련 글 : 중국 비구니 사찰에서 절밥 먹는 한국인​​) 케이블카에서 내다 보이는 얼하이 호수는 누군가 하늘의 맑은 색만 골라 붓질한 듯 푸르고 맑았다.


리우화의 막간 타임 : 마치 바다처럼 넓어 이름에도 해(海)가 들어가는 얼하이 호수. 이러한 풍경구는 창산의 동쪽 기슭에 위치한 얼하이호와 함께 ‘창얼’(苍洱)이라 불리며 윈난 4대 절경 중 하나로 꼽힙니다.



감통사 케이블카에서 내리면 가장 먼저 거대한 장기 말판, 진룽치지(珍珑棋局)를 만날 수 있다. 신선들이 놀음하다 갔을 것처럼 장기말 하나하나가 큼직하게 설치돼 있다. 전설에 따르면 선인이 남긴 장기판으로 그 수를 풀면 큰 지혜를 얻는다고도 전해진다.


레서 판다가 산다는 창산, 아쉽게도 만나진 못했다.
길이 평탄해서 노인과 어른도 가뿐히 등산할 수 있다. (자전거도 타고 다닌다)


노곤한 4월 햇빛이 어깨에 내려앉는 걸 느끼며 옥대운유로 트레킹을 시작했다. 길은 집 근처 산책길처럼 평이하게 마련돼 있다. 등산화도 필요 없다. 길 중간중간마다 미씨엔이나 로우촨(肉串, 고기 꼬치) 등을 팔고 있어 배도 채울 수 있다.



감통사에서 시마탄까지 가는 길은 경이로웠다. 겹겹이 펼쳐진 산세 하며 숲 너머로 걸려 있는 흰 구름까지 과연 선산이라 할만하다. 우리나라 산이 부드럽고 낮은 능선으로 다정한 느낌을 준다면, 중국의 산은 거대하고 묵직하다. 멀리서 봐도 숨이 멎을 듯한 위용을 자랑한다.



이날 창산을 찾은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시마탄에 가기 위해서였다. 창산 산맥에는 여러 고산 호수들이 많은데 그중 가장 유명한 호수가 바로 시마탄이다. 직역하면 ‘말을 씻는 연못’이다. 전설에 따르면 과거 관리나 군대가 말을 씻기거나 물을 먹이던 장소였다고 한다.


시마탄은 창산에서 가장 해발 고도가 높은 호수(약 3920m)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해발 고도가 높은 한라산이 1947m, 북한까지 포함하면 백두산이 2744m인 점을 고려하면 그 높이는 상상 이상이다. 운유옥대로 입구에서 한 시간가량 걸으면 시마탄 중간 케이블카 아래에 위치한 여행객 휴게소가 나온다. 이 휴게소 뒤쪽으로 난 길을 걸어 올라가면 케이블카 탑승 위치가 나온다.


계단 난간을 잡아야 할 정도로 가파르지만 내 앞의 아이는 유치원가는 듯 씩씩하게 올라간다.


그런데 이게 무슨 창산판 ‘천국의 계단’인가. 시마탄 중간 케이블카까지 올라가는 길이 전부 계단인 데다 경도도 꽤 가파르다. 뜨악한 표정으로 하산하는 아저씨에게 물어보니 30~40분은 걸어야 한단다. (그도 중도 포기했던 것)


창산의 시마탄은 입구조차 문턱이 높구나! 여기까지 왔는데 되돌아갈 순 없다. 심호흡 한 번하고 본격적인 계단 등반(?)을 시작했다. 평소 헬스 좀 했다 자부하지만 이 고산의 계단은 그런 자존심을 가뿐히 눌러버릴 만큼 만만치 않았다. 숨은 금세 가빠지고 한 계단씩 오를 때마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시마탄 중간 케이블 매표소가 보일 때쯤에야 스러지듯 계단에 앉아 쉬고 있는데, 7살 갓 넘어 보이는 꼬마 하나가 토끼처럼 껑충껑충 계단을 올라간다. 그 뒤를 헉헉대며 뒤쫓는 젊은 엄마와 눈이 마주쳐 어색한 맞웃음을 지었다. 우리, 나이 때문이라 생각합시다.



산 넘어 산이다. 이번엔 매표소에서 결제가 막혔다. 해발이 높아져 이심(esim) 오류로 결제 앱 (알리페이)가 작동되지 않았던 것. 현금도 딱 20위안이 부족해 쓸 수 없었다. 돌아가야 하는구나.


낭패감에 불쑥 눈물이 나오려는 찰나, 일행을 기다리던 한 남자가 슬쩍 옆으로 와 무슨 문제냐고 물었다. “제가 핫스팟 켜드릴게요. 와이파이 연결해서 다시 결제해 보세요. “ 천사가 나타났다! 그의 도움으로 앱은 정상적으로 작동됐다. 그를 부둥켜안고 싶은 마음을 꾹 참고 몇 번이나 감사 인사를 한 뒤 케이블카에 올랐다.


운무가 가득 낀 시마탄 정상, 실제론 한치 앞도 안 보일 정도로 많이 낀 날이었다.
4월인데도 눈이 녹지 않은 모습. 냉량한 기후로 고산 침엽수림과 진달래류 식물군이 자라 있다.


케이블카에서 내리니 산을 향해 함성을 지르는 관광객들로 가득하다. 해발 3900m. 걸음을 옮길수록 운무는 짙어져 마치 구름 속에 안긴 듯하다. 4월임에도 얼음장 같은 공기가 바람막이 속을 파고들었다. 고산지대에서만 자라는 구상나무의 향은 맑았고 땅에는 철쭉의 어린잎들이 촘촘히 생명을 틔우고 있었다. 인생 첫 고산지대! 설렘으로 숨이 가빠졌다. 여기서 좀 더 올라가면 빙하호수 시마탄을 볼 수 있는 전망대가 나온다.


처음엔 ‘이게 어딘가’ 싶을 정도로 물이 말라 있던 비수기 때의 시마탄
물이 가득 찬 모습일 때의 시마탄, 하늘이 투영된 아름다운 경관으로 유명하다.


그런데 이건 또 뭔 상황인가. 비 내리는 날 길가에 생긴 웅덩이처럼 시마탄이 조촐한 행색을 드러낸 게 아닌가. 주변 관광객에 물어보니 4월은 비수기라 물이 죄다 말랐다는 것. 이렇게 중요한 정보를 왜 사전엔 몰랐을까! 황망한 심정으로 시마탄 앞을 미련 남은 연인처럼 서성였다.


타고난 J형으로서 내 삶은 늘 계획 안에 있었다. 시간 낭비하는 게 싫었기 때문이다. 기자로 일할 땐 마감에 맞춰 시간 별로 정확히 움직였고 일상에서도 예외는 없었다. 무언가를 놓치는 것도 어긋나는 것도 싫었다.


그러나 여행은 변칙으로 가득했다. 아무리 촘촘히 계획을 세워도 온통 예외투성이었다. 날씨, 교통, 사람…어느 하나 내 맘대로 되는 게 없었다. 5주간의 여행 중 오늘은 단지 그 첫 번째 ‘예상 밖’의 일이었을 뿐이다.


그때마다 일일이 스트레스를 받으면 여행의 결말은 보나 마나 뻔했다. 이 여정의 마지막 장이 후회와 자책으로 채워지는 건 원치 않았다. 완벽해야 한다는 강박 속에 살던 내게 시마탄은 조용히 속삭였다.


조금 엇나가도, 아무 문제없어.


그래, 안개에 잠긴 시마탄이면 어떤가. 하늘과 가까운 곳에 내 발자국 하나 찍었으면 된 거다. 오늘처럼 틀어지고 어긋나는 순간도 결국은 여행의 일부니까. 흰 운무를 헤치고 시마탄 정상대에 올랐다. 그리고 다른 이들처럼 맑게 터지는 함성을 내질렀다.


“워 라이 러! (我来了! 나 여기 왔어!)”


잘 있어! 안개 속에 숨은 시마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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