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밌는 것과 즐거운 것은 살짝 다르다. 제약이 없다면 순수한 즐거움과 재미를 말하는 것인데, 제약이라는 소쿠리에서 걸러진 즐겁고 재미있는 것은 무엇일까?
나는 요리를 뚝딱하는 편이다. 음식 만들기는 재미있는 일이지만 즐겁지는 않다. 아침 일찍 출근하는 얼리 버드라서 평일에는 음식을 잘하지 않는다. 음식을 해야 하므로 좋든 싫든 일단 원재료의 쇼핑을 해야 한다. 쇼핑의 경우 옷을 사거나 갈비나 김치와 같은 먹거리를 만들기 위한 식재료를 사는 것은고단하다.
이따금은 쇼핑에서 둘러보는 것에 빠지기도 한다. 사실 쇼핑을 즐겨하지는 않는 편이라 좋아한다기보다 진열된 상품들의 출처를 상상하는 것을 좋아하는 것이다. 상표의 라벨을 꼼꼼하게 읽는 재미에는 잘 빠진다. 라벨의 종류도 가리지 않는다. 특히 화장품이나 소스류와 같은 액체의 구성 성분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의 화학 성분들이 나열되어 있는데, 읽고 기억할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거의 외계어처럼 느껴진다. 종이 '사전'이나 예전 시대의 '전화번호부'와 비슷한 느낌의 정보들도 있다.
나는 미지의 그 무엇에 심하게 끌려간다. 백화점에서도 식품관에서 외국의 상품에 적힌 이국의 풍미 가득한 라벨을 시간 가는 줄 모르게 읽는다. 마치 여행할 수 없는 현실에서 여행을 떠나는 느낌이 있어서일 것이다.
난 여행을 좋아하는 것이 틀림없는데, 자유여행을 선호하는 편이다. 패키지여행의 안전하고 편안함의 이면이즐겁지 않다. 여행은 함께 가는 사람의 구성이 중요한데 어느 순간 누군가의 어떤 면에 부딪혀 속으로 이를 갈며 내가 다시는 너랑 오나 봐라로 끝나는 경우 때문이기도 하다.
무엇보다도 여행 내내 가이드의 홍수처럼 쏟아지는 말을 들어야만 하고, 정해진 장소와 정해진 먹거리만을 먹어야 하는 틀이 가두리 양식장과 다를 바 없다고 느껴지는 위험을 감수해야만 한다. 혼자 하는 자유 여행은 안전과는 거리가 멀고, 자유롭지 않을 경우도 있다.
여행이란 마음이 이끄는 삶을 살고자 시간을 거슬러 보는 행위다. 현재 일상의 장소를 과감히 벗어나면 드디어 몸이 마음을 따라온다. 생각이 바빠지면 몸은 잠시 쉬었다가 생각을 따라 적응한다. 마음도 생각의 지도를 부지런히 정리한다. 잠시 생긴 틈새로 새로운 시간이 쓱 자리 잡는다. 한 번도 겪어본 적 없는 낯선 시공간이 실제상황으로 펼쳐진다.
제약 없는 여행이 반드시 혼자만의 여행은 아니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여행이라면 상대를 바라보느라 장소의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역시 내게 어떤 제약 없이 즐겁고 재미있는 것은 내면의 여행이다. 바로 책 읽기와 글쓰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