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겨울날에 읽은 그 책 여수의 사랑

by 김영신

<여수의 사랑, 한강, 문학과 지성사, 2024(3판 11쇄, 초판 1995)>을 읽기 전에 초판을 내던 30년 전의 작가의 말을 먼저 보았다. 작가는 '이 길뿐일까, 하는 끈질긴 의문을 버리고 나니 마음이 편해졌던 기억이 난다'라고 썼다. 1995년의 글이다.

책표지는 고요한 먹구름빛에 언 듯 연보라가 섞여서 형체보다는 느낌만이 가득한데 뒷장에는 책값이 적혀있지 않았다. 마치 이 책 안에는 돈이 매길 수 없는 무엇이 있다고 말해오는 것 같았다.


한강 작가의 이름은 당연히 강(江)이라는 것과 강이라는 한자에 물 수 변이 있다는 것이 왜 갑자기 느껴졌는지 나만은 안다. 내 이름 영(泳)의 한자에도 물 수 변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내가 맺고 싶은 연결감은 시도 때도 없이 이렇게 나타난다.


어떤 자기 계발서에 돈이 돈을 부르는 마법이 있어 설탕에 꼬이는 개미처럼 줄지어 선 적은 있지만 이제는 소설을 읽고 인생의 무엇인가가 휙 급격하게 바뀌었다는 사람에 대해 들은 바가 없다. 내게 여수는 마리나 대모님이 여수시인협회 문인이셨다는 인연 때문에 익숙하고 좋은 곳이었다. 그곳에 가서는 M호텔의 휑한 전망이 바다를 향해 있고, 방에 딸린 욕실에도 통유리가 있어 반짝이는 바다를 볼 수 있다는 것에 몇 번 감탄했었다.

인생 자체가 휴가라도 된 듯이 무용한 일과 돈이 되지 않는 연결에 매달리고 있는 날이었다. 이 책을 읽지 않으면 학점에 큰 구멍이라도 날 사람처럼 조급해하며 불안하게 매달리고 있었다. 아무튼 한강 작가의 젊었던 시절의 소설이라는 <여수의 사랑>이 과연 어떤 사랑인가 궁금해진 내가 웅크리고 앉든 말든 고즈넉한 겨울은 빠르게 서너 시간이 지나갔다.

한강 작가의 여수의 사랑은 어떤 이야기일까. 그들의 사랑은 한강 작가의 얘기가 늘 그렇듯 시처럼 농축되어 난해할까. 나는 책값조차 적히지 않은 책의 뒷장을 쓰다듬다가 마침내 첫 장을 열고 천천히 이야기들 속으로 들어갔다. 막상 들어가 보니 <여수의 사랑>은 단편 소설 여럿이 묶인 책이었다.


마치 그 사랑은 여수뿐만 아니라 전국의 어느 도시라도 태어나고 태어나지는 사랑과 작별의 가장자리를 예고하는 것 같았다. 룸메이트와 젊음의 한 시절을 보낸 주인공이 룸메이트와 공유된 도시가 여수였다. 주인공은 마침내 여수를 향하는데 뿌리를 따라 땅 속 깊이 들어가듯, 서울을 떠나 그 사람을 따라 여수로 향하는 길의 이야기였다.

안부 전화도 가끔 걸곤 하는데, 자신만의 생각인지는 모르겠으나 장거리 통화가 끝나려 할 때마다 '언제 한번 오너라'라고 덧붙이는 그분들의 담담한 목소리가 어쩐지 자꾸만 '이제 그만 연락하거라' 하는 말같이 들린다는 것이었다. <여수의 사랑, 44쪽>


그렇게 한없이 올라가니까 논이 끝나는 곳에 착하고 동글동글하게 생긴 무덤 몇 개가 비석도 없이 길가에 돋아 있었어요. 더 올라가면 캄캄해질 것 같고 해서 그쯤에서 내려가보려고 돌아섰지요. 그런데 이상하지요...... 그냥 '아름답구나' 하고 생각하면서 다시 길을 내려오는데 갑자기 눈물이 쏟아지는 거예요. <여수의 사랑, 56쪽>

대화 중간중간에 함부로 박혀 있던 욕설이 제거된 녀석의 말씨에서 어딘가 모르게 기성세대의 냄새가 나고 있었다. 내가 나의 무력한 젊음이 헐거워 견디지 못할 때 동걸은 이토록 몸에 꼭 끼는 생활을 치러내고 있었다고 생각하자 나는 더욱 외로운 생각이 들었다. <야간열차, 157쪽>


인규는 일곱 살에 죽은 진규를 기억하는 단 한 사람이었다. 진규를 사랑했으며 진규로 인하여 고통받은 단 한 사람이라고 믿고 있었다. 죽은 사람의 영혼이 그를 기억하는 자들의 마음속에만 서식한다는 말이 맞다면, 진규는 인규의 죽음과 함께 영원히 죽어질 영혼이었다. 그때에야말로 진규의 죽음은 완연해질 것이었다. 그런데 어머니가, 진규를 거적때기에 싸고 봉분도 없이 묻은 어머니가 다시 진규를 부르고 있었다. 이십 년 동안 한 번도 진규의 이름을 입에 올리지 않았던 어머니였다. "다시 너를 낳고 싶다 진규야!" 빗소리가 인규의 귓속을 할퀴었다. 어머니가 빗속에서 울부짖고 있었다. "다시 너를 낳고 싶구나, 돌아오겠느냐? 나에게 돌아오겠느냐?" <질주, 224쪽>


소설 끝에는 문학평론가 강계숙 님의 해설이 있다. 그는 <여수의 사랑>에 대해 세대를 아우르는 정서적 교감을 낳는 보편성의 획득이라고 말한다. 기형도 시인의 <진눈깨비>와 비슷한 이미지라고 말하는데, 나는 해설을 읽으면서 한강 작가의 소설에서 짓이겨지는 고통이 사라지지 않는 이유를 본 것 같았다.


진눈깨비가 쏟아진다, 갑자기 눈물이 흐른다, 나는 불행하다 이런 것은 아니었다, 나는 일생 몫의 경험을 다 했다, 진눈깨비 -기형도, 진눈깨비(부분), 303쪽-


문학이 삶의 빛과 어둠을 말해줄 수 있다면 그것은 소설뿐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한강 작가의 단편 소설을 읽으며 끝내 소화할 수 없는 과거의 고통을 본 것 같았다. 끝없는 토악질의 사람이 간직한 수채화처럼 맑자만 붉어진 눈동자와 언 듯 시선이 마주친 것 같았으며, 진규를 부르며 통곡하는 어머니 앞에서는 울컥 눈물이 솟았다.


이 사연들이 소설이라 그저 있을 법한 상상의 이야기라 얼마나 다행인가라고도 생각했다. 책을 덮으며 여전히 목이 메어 차갑게 식은 아메리카노를 두어 모금 마시고 일어나는데 갈 곳이 생긴 사람과 갈 곳이 사라진 사람의 간격만큼 겨울날은 서둘러 저물어 있었다. 왠지 여수에 가면 혈연으로 맺어진 조상 누군가의 봉분이 있는 산기슭과 전봇대가 드문드문한 작은 길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