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책의 문장을 필사하기 시작한 이유는 아까움 때문이었다. 문장이 잠시 고였다가 연기가 흩어지듯 기억에서 사라져 버리는 것이 너무나 아까웠다. 처음에는 그냥 수업의 노트 필기처럼 마구 적으면서 공책에 담아두었다.
책이 책을 부르는 독서의 세계에 들어가자, 문장을 쓰는 일은 채집이 되었다. 마치 유년 시절의 여름방학 숙제의 곤충 채집처럼 문장 채집을 했다. 사실 나는 그렇게 적으면서도 이 필사 내용과 문장이 내 삶에 힘이 돼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문제는 쓴 후에는 흡족해져서 이마저 곧 잊혔다는 데 있었다.
읽은 책은 다독을 넘어 쓰레기 산처럼 쌓여서 오직 나만의 문장을 찾는 일은 어디에 꽂힌 광증의 책 읽기가 되었다. 어느 해엔가는 하루에 책 한 권을 읽지 못하면 책을 굶은 책 좀비가 되어 주중에 못 읽은 책 7권을 쌓아두고 주말 내내 책만 파먹고 살기도 했다.
이렇게 읽는 일에 제동을 건 것은 바로 눈 건강이었다. 애초부터 나빴던 시력은 급격하게 나빠졌다. 낮과 저녁과 밤의 시력이 모두 다른 현상에 심한 난시가 겹쳐서 더 이상 읽음에 집중하기가 어려워진 것이다. 간서치 청장관 이덕무의 문장에는 여전히 들어가지도 못했고, 브론테 자매들의 원서는 들춰볼 틈도 없이.
그러던 중에 블로그에서 '지혜로운 숲 혜림'님의 필사 모임인 '꿈필'을 만났다. 이리저리 문장을 찾아 헤매지 않아도 좋았다. 새벽 6시의 문장이 오픈채팅방을 통해 내게로 왔다. 어느 날은 꿈결처럼 예전 그 책의 문장이, 어느 날은 그 책의 다른 문장이, 어느 날은 낯선 책의 문장이 와서 마음을 간지럽혔다.
어느새 필사를 시작한 지 300일이 넘었다. 필사하는 동안 내 생활에는 꿈결 같은 변화가 있었다. 전자책 <영어로 가는 결정적 순간들, 작가와>를 썼고, 브런치 작가가 되었으며, 공저 에세이 <누구나 처음 가는 길, 11인 공저, 고유출판사>를 출간했다. 필사의 문장들은 내게 행동을 요구하는 에너지였기 때문이다.
내게 겨울은 필사의 계절이다. 나무처럼 단단한 외피를 입고 더욱 깊이 땅 속 생활을 한다. 지난 시간에 묻어둔 양식을 조금씩 먹어가며 마음에 닿은 문장에 감동하며 글을 쓴다. 발행하지 않는 글을 묵혀두다 보니 친한 이웃 이 슬쩍 말을 건넸다. "브런치가 있잖아요. 브런치 서랍에라도 넣어 두세요. 아까워요."
그 말을 듣는데 나는 뜬금없이 내가 사랑하는 박정민 배우가 생각났다. 정확히는 박정민 배우가 배우가 되고 싶어 노력하고 또 노력할 때 곁에 있던 중견 배우가 한 말이다. "넌 이미 배우인데 뭘 자꾸 배우가 되려고 해." 이 계절이 겨울이라 얼마나 다행인가. 넌 이미 쓰는 사람이라 작가인데 뭘 작가가 되려고 해. 겨울이라 흰 눈이 날려 황홀하고, 모아둔 양식은 넉넉하지 않아도 봄이 올 때까지 조금씩 먹어가며 견딜 수 있으며, 책을 읽고 쓸 수 있어 행복하다.
지금도 책을 쌓아 두고 독서 삼매경에 빠지기는 하지만 필사에 진심이 생기다 보니 허겁지겁 읽지 않는다. 천천히 아주 느리게 책을 읽고 선비처럼 문장을 적으며 생각하는 시간을 갖는다. 진심을 담아 필사하면서 삶은 달라졌고 앞으로도 달라질 것을 예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