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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 별꽃이 필 때면

by 김영신

봄이 왔다는 것을 들은 것은 삼월이 막 시작된 즈음이었다. 기모 내복을 입고도 피부에 닿는 바람은 여전히 찼다. 계절에 성급한 아이들 몇몇은 아예 반팔티를 체육복 안에 입고 왔다. 나와 시선이 마주치자, 봄이니까요라고 그들 중 한 아이가 느닷없이 내게 말했다.


그렇지 봄이지라고 얼떨결에 대답하고 나서야 봄이 왔음을 느꼈다. 봄이란 마음 안에서 시작되고 말로 확인된다는 것을 그제야 알았다. 아직 풀조차 싹을 내지 못하던 삼월 초순 이른 봄날이었다.

반팔과 반바지로 뛰어다니는 남자아이들은 겨우내 자란 키 탓인지 껑충해진 비율이었다. 신기하게도 예전부터 알던 아이처럼 느껴지지만 실은 처음 만나는 사람들이다. 직장은 옮겨졌고 사람들도 건물도 모두 낯설다. 익숙하다면 여전히 찬 아침 공기와 단단한 나무의 외피와 자꾸만 움츠리려는 나의 자세다.

그새 폭설도 한차례 왔다. 삼월인데 꽃샘추위라고 하기에는 여전히 겨울이었다. 거칠게 터진 나무의 외피처럼 누구도 품을 수 없을 것 같이 건조한 계절은 계속되었다. 책을 좋아한다고 말하거나 글 쓰는 것이 본업에 가깝다는 말은 실종되었다.

이따금 동네 도서관에 들러 와이파이를 열고 두어 시간 집중해서 업무를 하면서도 서가에는 가지 않았다. 책의 얼굴과 숨결을 느끼면 숨이 차올라 울었을 것이다. 책의 모습을 잊으려는 듯 서평 관련 신간 서적의 낯선 표지와 목차를 더듬을 때에야 민들레 꽃을 보았다. 마침내 사월이 왔다.

사월이 오면 노란 별 모양의 개나리가 핀다. 올 개나리는 꿈속에서나 피려는지 노란빛을 보기가 어려웠다. 내가 사는 곳에는 개나리가 없다. 동네 중학교에나 가야 그 학교 담장에서 개나리꽃을 볼 수 있다. 그곳을 갈 이유나 여유는 없다. 마침내 낯선 출근길 제2 자유로를 달릴 때 먼 곳에서 핀 개나리꽃을 보았다. 나풀거리는 노란 시폰 커튼 같았고 노란 꽃 폭포처럼 보였다.


길가에 개나리가 피었으므로 진달래도 피었을 것으로 생각하다가 뭐가 그리도 급하신지 서둘러 천국으로 떠난 대모님이 그리워져서 마음이 아파졌다. 봄을 유난히 좋아하고 봄꽃을 사랑하던 그 분과는 온유함이라든가 아름다움과 같은 추상적인 개념을 듣기만 해도 좋았다. 실체 없는 말의 실체는 마음으로 전하고 받는 것이어서 사랑이라든가 용서라든가 심지어 기도 안에서 만나자는 인사마저도 좋았다. 몸의 실체가 사라지려고 그렇게 아팠던 것일까. 대모님의 아름다운 말은 유고 시집으로 남았는데 나는 책의 모습으로 남은 그분의 시를 읽으며 더욱 서러워졌다.


노란 별꽃은 내가 사랑하고 나를 아끼던 사람을 생각나게 한다. 이제 별꽃 개나리가 하나둘 시들어가면 씩씩한 초록 잎이 가득해질 것이다. 봄이 깊어지면 그리움도 깊어지고 문득 삶의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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