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성 들였던 세계가 결국 끝났다.
2022년 3월 1일,
이 날은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던 삼일절이기도,
애써 쌓아 온 나의 세계가 결국 무너졌음을 확인한,
휴직 첫날이기도 하다.
이제 나에게 매년 3월 1일은,
어쩌면 삼일절 이상의 의미를 가진 날이 되었다.
1월의 마지막과 함께 우리 반 아이들을 졸업시키고,
휴직까지 남은 한 달, 그 추운 2월의 한 달은
'사람이 이렇게 망가질 수 있구나'라는 걸
몸소 쓰라리게 겪는 시간이었다.
머릿속을 가득 채우는 허무함, 분노, 억울함, 서러움
머리부터 발 끝까지 제 기능을 다 하지 못하는 몸!
그리고 무엇보다, 누구보다 '유아 교육'이라는 분야
를 애정하고 노력하며 가치롭게 여겨왔던 자신이
사람에, 세상에 버림받았다는 상실감!
내 몸과 마음은 비합리적 신념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나는 버림받았어.
세상에 믿을 사람 없고, 진심은 통하지 않아
2월 내내 방학인데도, 누가 시키지 않았는데도
틈만 나면 유치원에 편한 복장으로 출근했다.
진심으로 임한 것 밖에 없는데 '버림받았다'라는
왜곡된 생각으로 가득 찬 나에게
몸을 움직일 시간이 필요했다.
그래야 잠시 그 무서운 생각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마침 공립학교의 회계 마감 시즌답게,
남은 예산이 가득했고 누군가는 이 돈을 써야 했다.
유치원 동지들은 눈코 뜰 새 없이 바빴고,
'선생님들에게 해 주는 마지막 선물'이라는 핑계로
내가 그 엄청난 예산을 사용하는 일을 자처했다.
그런데 사실은 선물이 아니었다.
나 살겠다고, 썩은 동아줄이라도 잡는 심정으로
단순하면서, 업무 양이 과한 일을 맡아 미친 듯이
몸만 움직이고 싶었던 의도였다.
어쩌면 내 깊은 무의식 속에는 나도 다른 선생님들
처럼 설레는 마음과 건강한 몸으로 한 반을 맡아
새 학기 준비를 하고 싶었던걸 지도 모른다.
매일 놀잇감을 찾아보고, 구매 과정을 거치고,
한 교실 안에 산처럼 쌓인 박스들을 언박싱했다.
쉴 틈 없이 바삐 움직였고 오히려 아픈 몸을 더욱
혹사시켜야 마음이 편했으니,
이 일을 자처해서 맡은 게 다행이었다.
그렇게 외줄 타듯 위태로운 2월을 버텨내고 있는데
3월 1일,
이 유치원에서 잠시, 어쩌면 오랜 시간 동안,
어쩌면 영원히 떠날 휴직 첫날이 점점 다가왔다.
장점은 섬세하고 당당한 태도,
단점은 예민하고 자주 아픈 몸과 마음,
특기는 눈치 500단
이런 성격 덕에 난 휴직 첫날이 오는 게 마냥 반가운
것은 아니라는 걸 알아차렸다.
휴직 첫날이 제일 위험할게 틀림없었다.
엄청난 부정적 감정의 소용돌이와 소진된 몸으로
우울증의 최대 위기인 하루일 것이고,
해서는 안될 행동을 하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휴직을 며칠 앞두고 나는
3월 1일에 살아남을 수 있는 온갖 방법을 구상했다.
역시, 속세에서 떨어진 곳에 있어야 할 것 같았다.
그런데 멀리 떠날 수는 없었다.
그때의 나는 지하철의 머리 아프고 답답한 고통도
버텨내지 못하던 심각한 상태였기에,
서울에 있는 산 위에 올라가는 게 최선이었다.
하지만 보호자가 필요했다.
보호자가 없다면 그 산은 더 위험한 공간이 될 테니
어떤 사람이 보호자여야 최선일지, 고민을 거듭했다
그다지 친하지 않은 사람 ( 친한 사람이라면 내가 눈치를 보고 억누르며 씩씩한 척할 테니)
내가 울던, 주저앉던 모른 척해 줄 것 같은 사람
( 혼자 망가져버릴 시간이 필요한데, 챙겨준답시고 곁을 떠나지 않으면 그건 역효과이기에)
내가 혹시 극단적 행동을 시도하면
나를 안전하고 완벽하게 제압해줄 수 있는 사람
정말 다행히도 이 까다로운 조건에 부합하는,
내가 평소에 '산 할아버지'라고 부르던
한 분이 떠올랐다. 아무것도 모르시고 흔쾌히 함께
가주겠다고 하는데 어찌나 미안하던지...!
그렇게 우리는 휴직 첫날 산을 올랐다.
내가 어떤 심정으로 그 산을 올라갔는지는 모른다.
지난날의 고통, 모든 것을 쏟아부었던 시간,
상처가 되었던 시간과 말들 하나하나가 섞여 정체
를 알 수 없는 큰 불구덩이가 마음속에 자리했고,
내 의지로 조절할 수 없는 눈물이 뚝뚝 흘렀다.
그 불구덩이에 집어삼켜진 상태로 산을 올랐으니,
사실 그 산행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저 나는 울었고, 해가 질 때까지 울었고,
산할아버지께 "절대 저 버리고 가시면 안 돼요"를
수없이 반복했던 기억만 난다.
아! 일몰이 살면서 본 일몰 중에 가장 아름다웠다.
그 황홀한 일몰과 함께 내가 정성껏 쌓아온 세계가
막을 내리고 있음을 실감했다.
덕분에 위험천만한 휴직 첫날을 안전하게 보내고
살아남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3월 한 달간 침대에 누워 천장만 바라보았다
'어딘가에 흡수되어 사라졌으면'하는 마음으로,
그날부터 시작이었다.
그저 아프기 위해 살아가는 하루하루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