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중 12kg이 빠졌다

빠져나가버린 체중, 함께 사라진 많은 것들

by 해봄

내 행복은 맛있는 걸 먹는 일이었다.

맛있는 걸 먹으면 기분이 날아오르며 스트레스도 함께 날아간달까.....!


하지만 난 이제 그 행복을 느끼지 못한다.

우울증에 따라온 신체화 증상으로 식욕과 소화력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우울증 진단을 받은 지난 10월부터 유치원에 근무했던 2월까지 무려 10kg이 빠져나갔다.

이 기간 중 1달 반 은 방학이어서 집에서 식사하며 사실상 재택근무를 했으니,

3달 반 동안 10kg이 빠져나간 셈이다.

유치원에 있으면,

신경이 지나치게 과민해 액체밖에 삼킬 수 없었다.


유치원에서 유독 음식만 봐도, 냄새만 맡아도 속이 울렁거리며 구역감이 느껴졌지만

그걸 다 참아내고, 아무렇지 않다는 듯 웃는 얼굴로 아이들 점심식사 지도를 했다.

'점심시간만 32배속으로 감아버렸으면' 하는 내 마음을 느낀 건지, 우리 반 아이들의 식사 속도도 날이 갈수록 빨라졌다.


안 그래도 어지러움, 수전증, 이명, 두통 등 랜덤 플레이되는 신체화 증상으로 교무실 자리에 앉아있기조차 힘들었는데, 유치원에서 먹는 것조차 안되니 내 하루는 더욱 힘겨워졌다.


이 와중에 내 할 일은 알아서 척척 해내야 직성이 풀리는 나 자신이 너무 미웠고, 미련해 보였다.

'해봄아 넌 왜 적당히를 못하니. 제발 정신 차려라.'

생존 약물에 기대어 겨우 겨우 정신력으로 버텼다

이것이 바로 나의 생존약물이었다.


이 유치원에서 내 걱정을 해주는 건 감사하게도 이 고통을 바로 옆에서 지켜보는 선생님들 뿐이었다.

선생님들은 마치 조건 형성된 파블로브의 개처럼, 눈에 비타민 음료가 보이면 항상 사와 내 손에 쥐어주었다.

나도 매일 출근 전 편의점에 들러 오늘의 비타민 음료를 사는 게 아침 루틴이 되었다.


막판에는 일은 많은데 도저히 앉아있을 힘조차 없어서 일거리를 들고 퇴근하곤 했다.

일단 집에서 뭐라도 먹어야겠으니까.

그나마 집에서 먹을 수 있는 음식도 고구마 무스, 단호박, 연두부 등 으깨어진 음식뿐이었다.

그래도 이거라도 먹으면 좀 살 것 같았다.


하지만 사실 상 나에게 우울을 제공한 유치원 사람들은 "어머~왜 이렇게 핼쑥해진 거야" 말만 하셨다.

왜긴 왜야. 당신들 때문이지 흥


하원길에 뵙는 학부모님들은 하나같이 "얼굴이 너무 안 좋다." "무슨 일 있으시냐." "살이 계속 빠지시는 것 같다."라고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어보셨고,

나는 애써 웃으며

"요즘 다이어트가 잘 되네요"라는 거짓말로 답변을 대신하곤 했다.

결국 학부모님들 사이에 '담임교사 건강이상설'이 퍼지고 있음을 아이들에게서 전해 듣고,

솔직하게 아이들에게 이야기했다.

선생님은 지금 사실 많이 아픈데,
너희들이랑 졸업식까지 꼭 함께하고 싶어서
유치원에 오는 거야
너희들이 좋아서 오는 거야
그러니 선생님이 좀 힘이 없어도 봐줘라...!


이렇게 말한 뒤로 학부모님들도 모른 척해주시고,

아이들도 나를 정말 많이 도와주었다.

씁쓸하게도 나를 이렇게 만든 장본인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나를 도와주고 걱정해주었다.


휴직한 이후에도 여전히 식욕은 없고 소화능력도 약하지만, 의무적으로 끼니를 꼭꼭 챙겨 먹고 있다.

체중이 빠지면 힘과 정신이 빠져나간다는 걸 뼈저리게 느껴서, 살기 위해 노력 중이다.


그런 내 노력에도 불구하고

7월이 된 지금 야금야금 2kg이 더 빠져,

총 12kg이 줄어들었다.


오랜만에 만난 사람들은 나를 보면

"아픈 사람한테 미안한데 너무 예쁘다"라고 말하곤 한다. 이 아픔을 느끼지 못한 사람에게는 그렇게 보이는 게 당연하기도 하다.


그런데 나는,

체중이 빠지기 전으로 돌아가고 싶다.

볼살이 터지도록 살이 올라있던 예전 사진 속의 나는 정말 행복하게 웃고 있는데,

지금은 아무리 밝게 웃어도 그때 그 표정이 나오지 않는달까...!


나는 12kg이 빠진 덕분에 다이어트를 거저 했지만

먹는 즐거움을 잃었고,

넘치는 밝은 에너지를 잃었고,

식사자리가 부담스러워 많은 관계를 잃었고,

'힘들지 않은 느낌'을 잃었고,

아직 휴직 중이지만 공립유치원 교사생활을 잃었다.

그리고 건강을 잃었다.


날씬한 몸 하나를 얻고,
수없이 많은 것들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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