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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봉 Jun 08. 2024

  누  님

한 명뿐이었던 나의 누나

김 군은 가난한 집안에 장녀로 태어나 제대로 배우지도 못하고

초등학교만 졸업하고 남의 집 식모로 팔려가 몇 푼 되지도 않은 돈을 받고 살다가

조금 머리가 커지자 봉제공장에서 잠도 제대로 못 자면서 죽어라고 일만 하던 누님이 계셨다고 한다

한창 멋을 부릴 나이에 얼굴에 바르는 화장품하나 사 쓰는 것도 아까워 안 사고

돈을 버는 대로 고향집에 보내서 동생들 뒷바라지했다.

그 많은 먼지를 하얗게 머리에 뒤집어쓰고 몸은 병들어 가는 줄도 모르고 소처럼  일만 해서 동생 셋을 대학까지 보내서 제대로 키웠다.


이 누나는 시집가는 것도 아까워 사랑하는 남자를 눈물로 보내기도 했지만 이를 악물고 감내하며 숙명이라

 생각하고 그렇게 늙어 갔다.

그러다 몸이 이상해서 약국에서 약으로 버티다 결국은 쓰러져 동료들이 업고 병원으로 데리고 갔는데,

위암말기라는 판정을 듣는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수술을 해서 위를 잘라내면 살 수 있다고 했다.

김 군의 누나는 미국에 살고 있는 큰 동생에게 전화를 한다.


"동생아 내가 수술을 해야 하는데 3,000만 원 정도 든 단다"

동생이 골프를 치다 말고 말합니다. "누나, 내가 3만 불이 어딨 어"

누나는 "알았다, 미안하다" 힘없이 전화를 끊는다

그러고 나서  둘째 동생에게 전화를 한다

둘째 동생은 변호사이다. "동생아, 수술을 해야 하는데 돈이 없네, 어떡하냐?

둘째가 말한다.


"누나 요즘 수입이 없어서 많이 힘드네" 하고 바로 전화를 끊어버린다

맥이 빠진 누나는 막내 동생에게 전화를 한다

이런저런 사정얘기를 하자 막일을 하며 힘겹게 사는 동생이 부인과 함께 단숨에 뛰어 왔다

"누나, 집 보증금을 빼왔어, 이걸로 수술합시다"

누나는 막내의 사정을 빤히 알고 있기에 그냥 두 부부를 부둥켜안고 울기만 한다


수술하기 전날 밤 보호자 침대에서 잠이 든 올케를 바라보던 누나는 조심스레 옷을 갈아입고 안갯속으로

걸어 나갔다

횡당보도에서 있던 누나는 자동차 불빛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렇게 누나는 한 많은 이승에서의 삶을 마감하고 만다

꿈속에서 조용히 미소를 지으며 어깨를 토닥이는 누나의 손길이 느껴져 놀라 깨어보니..

누나의 자리가 비어 있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빈 침대 위에 놓인 편지를 본다


몇 줄의 글이 눈에 들어온다

"막내야, 올케야, 고맙다." "죽어서도 너희들을 지켜주마..

내가 그나마 죽기 전에 보험을 들어 놓아서 이거라도 줄 수 있어서 참 다행이구나"

참으로 기구한 운명이다


누나가 죽자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않은 다른 두 동생들은 누나의 사망보험금이 상당하다는 걸 알고

막내를 협박한다

"우리와 똑같이 나누지 않으면 가만있지 않겠다"

"법적인 모든 것을 동원하겠다" 두 형수들과 함께 욕을 하며 막내 부부에게 위협을 가한다

결국은 법정다툼으로 갔습니다. 막내는 그냥 줘버릴까도 생각한다


하지만 누나의 핏값을 두 형으로부터 지키고 싶었던 막내는 결국은 소송을 시작한다

그 소식을 들은 친구가 변론을 맡아 주기로 했습니다 몇 개월의 소송 끝에 판결을 받는다

판사는 떨리는 목소리로 판결문을 읽어 내려간다

그리고 누나의 휴대폰에 저장된 문자를 읽어주자 두 형들은 두 말하지 않고 밖으로 나간다

김 군뿐만 아니라 대부분이 곤궁에 처해 도움의 손길을 비칠 때 그 사람의 본심이 드러난다


좋은 때 잘하는 것은 짐승이라도 잘하는 거다

자신에게 조금만 손해 간다 싶으면 외면해 버리는 게 인심이다

이렇게 불쌍하게 삶을 마감한 김 군의 누님은 성자와 같은 삶을 살다가 그렇게 죽어 갔다


살아 있을 때 효를 다하고 의를 다하고 예를 다하고 정성을 다하고 어려울 때 성심으로 대하는 참된 우정과

사랑을 베풀고 나눌 수 있어야 사람다운 사람이다.


1960년대 70년대는 산업화시대로 김 군의 가정뿐만 아니라 더 어렵고 가난에 힘들어하는 가정들이 너무

많았다. 김 군보다 힘들고 가난했던 우리 집은  4남 3녀의 7남매가 힘들게 성장하면서 같은 방에서 

목화이불 하나로 온기를 느끼면서  살아왔다

가난한 집 장남으로 태어난 나는 위로 두 살 많은 덕순이 누나가 한 분 계셨다. 내가 태어난 고향은

 마을이라야 대 여섯 가구가 모두 일가친척으로 농촌이라기보다 울창한 숲으로 둘러싸인 산촌이었다.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한 명뿐이었던 누나 친구들은 열세 살에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진학해서 공부하는데 누나는 논밭에 나가 농사를 짓는 부모님을 도왔다. 뙤약볕 아래에서 풀을 뽑고 비료를 뿌리고 농약을 치면서 너무 많은 고생을 했다.

나는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30리 떨어진 읍내 장흥중에 진학해 자취했다. 매주 토요일 오전 수업을 마친 후 시골집에 오면 가장 먼저 누나가 마당에서 뛰어나와 반갑게 맞아주고, 내 검은색 교복을 손수

세탁해 다리미에 숯을 넣어 구김 없이 다려 주었다.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누나는 동생인 나를 통해 대리만족을 느꼈는지도 모른다. 누나는 다림질을 해주며 “너는 우리 집의 장손이고 장남이니 열심히 공부해서 성공해야 한다”라고 수없이 말했다.


이 세상에서 오직 한 명뿐인 누나는 고향에서 부모님의 농사일을 돕고 인근 마을에 가서 그 어린 나이에 바느질을 배웠다. 그러다 20대 초반에 울산 현대조선에서 일하던 고등학교를 졸업한 매형을 중매로 만나 결혼했다. 매형은 시골에서 상업고를 졸업하고 회사에 다니면서 누나와 결혼했는데 누나가 초등학교만 졸업했다는 사실을 알고는 많이 무시하고 괄시했다고 먼 훗날 알게 되었다.

누나는 맏며느리로 신혼 시절 설움도 많이 받고 마음의 상처를 많이 받았다고 훗날 누나와 지인들에게

들었다.



그 당시 누구나 그랬지만 나 역시 경제적으로 어려웠던지라 간신히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국가의 부름을 받아 현역병으로 3년간 군 생활을 하고 제대해 울산에서 신혼살림을 했던 누나에게 의지하고 있었다. 아침이면 누나가 해준 아침밥을 먹고 점심과 저녁 도시락 2개를 싸서 누나의 전셋집과 가까운 독서실에 가서 밤새도록 공부하고, 밤이면 독서실 바닥에서 잠을 자면서 공부했다.

[몇장 남지 않은 누나의 시진]

          [외할아버지 회갑 때 어린 시절의 누나사진]


누나의 뒷바라지 덕분인지 독서실에서 힘들게 공부한 지 두 달 만에 김포국제공항공단과 경찰공무원인 순경 공채 시험에 합격해 울산에서 서울로 올라왔다. 두 곳의 필기시험에는 합격했으나 면접시험에는 낙방해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별별 고생을 하면서 철도청과 우체국 그리고 지방 행정직 공무원에 합격해 공직 생활 33년을 마치고 명예스럽게 정년 퇴직했다.


                    (고향집 전경)


누나는 울산에 살다가 고향으로 내려와 농사를 짓다가 고등학생이던 딸을 뒷바라지했는데 딸이 고3 때 백혈병에 걸려 서울 아산병원에서 1년 동안 치료하다가 하늘나라로 떠났다.

누나는 잠도 제대로 못 자고 서울아산병원에서 1년 동안 간병을 하면서 너무 많은 고생을 했다.

이렇게 고생하는 누나를 보살피고, 고등학교 3학년 소녀이고 나에게는 조카인 누나딸을

어떻게 하든 살려보기 위해 매주 토요일이면                      

아산병원으로 가서 누나에게 수백만 원의 병원비를 보태주고 완쾌되도록 응원을 했지만 조카는 1년 동안 병마와 싸우다 하늘나라로 떠났다.

누나는 사랑스러운 딸이 너무 허무하게 하늘나라로 떠나버려 슬픔과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는지 딸에

이어 혈액암에 걸려 이 세상 한 명뿐인 내 누나마저  영영 다시 올 수 없는 딸의 곁으로 떠나버렸다.


그렇게 우리 누나가 한 많은 세월을 사시다가 50대 초반에 하늘나라로 떠난 지 벌써 15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저 멀리 떠나버린 불쌍한 누나가 너무나 보고 싶다.

지금 살아계신다면 나도 정년퇴직한 지 6년이 지났으니 누나 나이 70세가 되어 갈 것이다.

이렇게 한번 인생이 꾀이다 보니 누나가 떠나니 사랑하는 내 남동생 금채와 병희도 교통사고로

떠나고 어머님 마저 백주의 대낮에 오토바이에 다쳐 내 곁을 떠나 버려 명절이나 휴가철이면

형제들이 그립고 누나와 부모님이 엄청 보고 싶고 그리워진다.

그래도 김 군의 누나는 혼자 헌신해서 남동생들을 대학까지 다 보내줬는데 몰상식하게 나 몰라라하고

인간성이 없지만 우리 남매들은 비록 작열하는 뙤약볕에 나가 보리와 풀 모내기 산에 가서 아궁이에

땔 나무를 하는 게 하루생활의 일상사이었고, 가난해서 다들 초등학교만 졸업한 누나와, 중학교만 졸업한 동생, 그리고 고등학교를 다니다 말면서 하위직공무원시험에 합격해 비록, 나 혼자서라도 공직의 길을 걸으면서 방송강의와 야간강의를 들으면서 대학을 다녔으니 그나마 행복하다.


(내 결혼식 날 누나의 모습 )


모든 형제들과 누나가 살아계신다면 이제 나도 정년을 하고 시간적 여유도 많으니

 우리 남매들도 다른 집 형제자매들처럼 자주

 만나 함께 식사하고 여행도 같이 다닐 것인데 이제는 모든 꿈들이 샅샅이 깨져 버리고

희망도 없어져 버려 마냥 쓸쓸하기만 하다.


누나와 형제들이 생존해 있었다면 어려울 때

서로 의지하고 타협하면서 남매간에 우애와

우정을 쌓으면서 행복한 인생 후반기를 즐겁게

살아갈 것인데 내가 복이 없는 탓인지 너무 빨리                             떠나버려 지나가는 세월도 참 야속하기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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