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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니 Sep 29. 2024

아픈 결정

어쩔 수 없었다

아빠의 가내 수공업용 공장은 내가 중학생이 되던 해를 전후로 쇠락의 길로 가고 있었다.

기계는 어차피 있는 것이니 아빠는 혼자라도 공장을 유지하고 싶어 하셨지만,

혼자서는 할 수가 없었다. 아빠는 유능한 공장장은 되시지 못하셨다.

엄마가 7할 아빠가 3할... 7할을 차지하는 엄마가 공장을 닫자고 하셨다.

두 분은 치열할게 자주 다투셨다.

공장 문을 닫는 날, 기계들을 헐값이 처분하셨다. 

사람들이 기계들을 싣고 나가는 모습을 바라보던 아빠의 눈빛과 그때의 분위기...

30년이 넘었지만 잊히지 않는다.


할아버지, 엄마, 아빠, 동생, 나 이렇게  다섯 식구 밥 먹고 사는 일이 

어린 내가 보아도 막막해 보였었다.

엄마는 닥치는 대로 일을 하셨다. 

갈빗집에서도, 생선 파는 일도 안 해보신 일이 없으셨다.

그러나 아빠와 할아버지는 공장을 관둔 후부터는 일을 하시지 않으셨다.

나는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에 입학을 했었다.

엄마가 도시락을 2~3개를 싸주시면

저녁 늦게 집에 들어왔는데, 엄마는 나보다 더 늦게 들어오시는 일이 잦았다.

집에 가면 도시락 정리를 하고, 아빠와 할아버지, 동생이 먹었던 저녁 설거지가 남아 있는 

일이 많았다. 

나는 내 도시락 통들과, 집 식구들이 남겨뒀던 설거지를 하면서 아빠를 속으로 너무나 미워했었다.


내가 고등학교 때, 학교에서 집으로 오니 가까운 골목 끝에 등이 달려 있었다.

할아버지가 보름 전에 갑자기 배가 아프시다고 하셨다.

할아버지 사촌 동생분이 병원을 하셨는데, 검사를 받으시다 집에 오셔서 몸져누우셨다.

그 후로 할아버지는 자리에서 일어나시질 못하셨다. 

나는 100세를 거뜬히 넘기실 것 같은 할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셨다는 게 믿어지진 않았지만,

전혀 슬프지는 않았다.

할아버지는 내가 여자라 못마땅해하셨고, 

동생은 장애를 가지고 태어나서 손자로 인정을 하시고 싶지 않으셨던 것 같았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동생의 기행으로 엄마는 매일밤 잠을 이루지 못했다.

당시 엄마는 고기 발골 기술을 배워셔서 식육점을 하시다 

동생 문제가 심각해져서, 식육점을 파시고 동생 문제 해결에 종일 매달리셨다.

특수학교에서 만난 선생님들이나, 학부모들에게 전화를 돌리셨다.

동생과 상태가 비슷하거나 더 심한 아이들은 부모들이 어떻게 집에서 보살피는지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이지, 무언가를 알아내기 위해 몇 주일 간 전화를 하셨던 것 같다.


동생과 엄마 아빠가 함께 나가는 일도 종종 있었다.

그러다 어느 날, 저녁을 먹은 후 동생을 장애인 거주시설에 보내기로 하셨다고 말씀하셨다.

장애인 복지라는 개념이 없었던 시절이었다.


꽤 큰 목돈을 시설 관계자에게 줬다고 하셨다.

평생 거기에 있을 거라고도 하셨다.

동생이 가기 전까지 엄마는 매일 밤 동생을 끌어안고 우셨다. 

동생은 엄마가 왜 우는지 몰라서 웃었다.

동생이 가기 전 몇 주간은 엄마가 집에 계셔서 너무 좋았다.

학교를 마치고 집에 가면 따뜻한 밥을 해주시고, 

동생도 엄마가 하루종일 집에 계시니, 밖에 예전처럼 나다니지 않는 듯했다.

우리 집이 이토록 조용하고 평화로운 시간이 있었던가 싶었다. 

그러나 시간은 길지 않았다.

학교를 가는 아침에 엄마가 동생과 인사를 하라고 하셨다. 

내가 학교 갔다오면 이제 동생이 더 이상 집에 없을거라고 하셨다.

부모님은 동생을 보러 가겠지만, 나는 갈 필요가 없으니 집에서 마지막 인사를 하라고 하셨다.

인사할 필요가 있나 싶었다. 

동생은 어차피 인사라는 의미도 모르는데....

나는 동생에게 지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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