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니 Sep 22. 2024

그가 학교를 가다

즐거운 등굣길

이사를 가기 전에 동생이 할 수 있는 말은 거의 없었다. 그래서 물고 떼쓰기를 반복했는지도 모른다.

엄마는 시골에 살면서도 시간을 내어 동생을 업고 수소문을 해서 언어 치료실이란 곳을 다녔었다.

자주 가지는 못했지만, 나름 효과는 있었던 것 같다. 

치료실은 지금처럼 나라에서 운영을 한다든지, 바우처가 나온다든지 하는 시대가 아니었다.

모든 것을 자비로 부담을 했었어야 했다.

엄마는 먼 길을 동생을 업고 버스를 타고 다녀왔었다.

치료실을 가는 날이면 엄마는 새벽에 잠도 제대로 주무시지 못했다. 

식구를 밥을 미리 준비를 해놓고 가셔야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사를 가고 나니 언어 치료실도 자주 가게 되었고, 거기서 들은 이야기 중 동생이 갈 수 있는 학교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었다. 지금처럼 인터넷이 발달해서 정보를 쉽게 얻는 것도 아니었고, 

구전소설처럼 입에서 입으로 들을 수밖에 없었던 시절이었다.

엄마는 여기저기 물어서 동생을 학교에 넣을 수 있었다.

그 학교는 아침에 데려다줘야 했고 오후에는 데리고 와야 했다. 

엄마는 아침밥을 빨리 먹고 점심을 만들어 놓고는 동생을 데리고 학교 갔다 오기를 반복했었다.

동생 학교가 엄마 일에 추가된 것이었다.

동생은 학교가 기를 무척 좋아했었다.

자기와 어울릴 만한 사람이 없었는데 학교를 가면  선생님도 자기 말에 귀를 기울여 주고

같은 장애를 가진 친구들이 함께 있어 그런지 학교 가는 시간을 기다렸었다.

엄마는 동생 학교에서 돌아오시면 밀린 집안일과 공장일을 밤늦도록 하셔야 했다.

그 시절에 엄마는 항상 깨어 있는 사람인 줄 알았다. 

엄마가 잠을 제대로 자는 모습을 본기억이 별로 없었다.

이런 생활을 엄마는 몇십 년을 하셨었다.


아빠는 원래 결혼하지 않은 동생들과, 할아버지 할머니와 함께 사셨었다. 

그러다 아빠가 결혼하고 할머니가 돌아가시면서, 할아버지는 자연스레 장남인 아빠와 함께 사시게 되었다.

우리 할아버지는 고기와 술을 좋아하시고, 

없는 살림살이에 새 장가를 드시려고 꽤나 노력하시는 노력파 셨다.

할머니가 자식과 할아버지께 빛만 남기고 돌아가셨는데, 할아버지가 재산이 있을 리 만무하셨는데

돌아가시는 순간까지 새 장가를 가시려고 노력하신 게 아직도 내 기억에 뚜렷이 남아있다.


할아버지, 아빠 그리고 나와 동생은 성을 같이 쓰는 사이지만, 성만 같이 쓸 뿐

나는 성을 같이 쓰는 세 남자를  싫어하고 미워했었다.

할아버지의 철없음을, 아빠의 무책임함과 무능함을 동생의 장애를 미워하고 싫어했었다.


매일 저녁이면 동생을 찾아다니는 것도 지겹도록 하기 싫었고, 

할아버지의 철없는 행동들을 보는 것도 지쳤었고

아빠의 무능력함에 끝없이 가난하고, 엄마가 고생만 하는 것 같아 아빠를 제일 미워했던 것 같다.

아빠는 자신의 아들이 장애인으로 태어난 것에, 또 본인도 어떻게 할 수 없음에 술로 보내는 날도 많았다.

그리고 아빠도 동생을 좋아하시지 않았다. 어린 내가 옆에서 보아도 알 수 있었다.

그렇게 가족들에게 사랑받지도 동정을 받지도 못하는 동생이 한없이 불쌍하다고 

자는 동생 머리카락을 쓸어 주시면서 엄마가 말씀하시는 것을  잠결에 자주 들었다.


내가 초등학교때 우리 집은 가난과 동생의 장애로 하루도 편한 날이 없었다.

어린 시절에 나는 무척 예민한 아이였다. 조금만 건드리면 고함을 내지르거나 

밥 먹는 것을 싫어해서 초등학교 3학년 때까지 몸무게게 25킬로를 넘지 못했다.

반에서 제일 마른 아이였었다.

                                      초등학교 때 유일하게 3명이 함께 찍은 사진




이전 05화 시골탈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