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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다와강 Apr 05. 2024

난 다정한 사람이 싫다

영화 <오토라는 남자>

다정한 자가 승자?


작년까지 우리 사회엔 ‘다정함’이 화두였다. 아마도 다윈의 적자생존설을 뒤집고 ‘다정한 자’가 진화의 승자라고 외친 브라이언 헤어, 버네사 우즈의 책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영향이 컸을 것이다. 이 책은 발간된 지 2년 만에 누적 판매 10만 부를 넘겼는데, 전세계 중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이 팔렸단다. ‘다정함’이 절실한 사회여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이곳이 책 소개 자리가 아니니 책 얘기는 이쯤에서 접겠다. 궁금한 분들은 직접 읽어보시라. 내가 ‘다정함’을 꺼낸 이유는, 이 책 저자들도 언급했듯이, 다정함이라는 게 어느 순간 폭력으로, 비인간화로 쉽게 전화될 수 있다는 걸 말하고 싶어서다. 집단과 집단, 나와 남이 분리되는 순간, 다정함은 잔인해진다. 이럴 땐 차라리 무심함이 낫다.     


다정함, 살아남기 위한 애티튜드


우린 모두 에고를 감추고 페르소나를 쓴 채 살아간다. 일종의 위장술. 다정한 포즈로 살아간다. 그것이야말로 현대 사회에 필요한 애티튜드. 내 생각과 같지 않아도, 설령 상대가 틀렸다 해도, 필요하다면 우린 부드러운 비즈니스적 미소로 교양있게 사회생활하는 법을 안다. 속이 부글부글 끓어 목젓까지 쓴물이 올라오고, 머리뚜껑이 날아갔다 해도, 그것을 감춰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솔직히 다정함과는 거리가 먼 나도, 위기의 순간에는 나도 모르게 비굴한 미소를 지었으리라.


그러나 그 다정한 척하는 다정함이 진심일까. 다정한 척하다가 조금이라도 아니다 싶으면 바로 이빨을 드러내면서 이 사회는 왜 자꾸 우리에게 다정함을 강요하나. 그냥 생긴대로 살면 되지 않나. 아닌 건 아니다,  맞는 건 맞다. 그렇게 살면 살아남지 못하는 건가. 그런 쓸데없는 생각들을 하다가 이 남자를 만났다. '오토!'


《오토라는 남자 A Man Called Otto》


오늘 내가 할 얘기는 다정함과는 담을 싼, 어느 까탈스런 ‘꼰대’에 관한 것이다. 그 남자 이름은 ‘오토’. 영화 《오토라는 남자》(2023)의 주인공이다. 마크 포스터가 감독하고, 톰 행크스, 마리아나 트레비뇨, 레이첼 켈러 등이 출연했다. 원작은 스웨덴의 베스트셀러 소설 《오베라는 남자》. 재밌는 건 오토는 톰 행크스가, 젊은 오토는 톰 행크스의 아들인 트루먼 행크스가 맡아 연기했다는 것. 사실 이렇게 캐스팅이 됐으면 작품 속에서 젊은 오토와 늙은 오토 간 이질감이 별로 없었어야 하는데... 음... 부자가 꼭 닮아야 하는 건 아니니까!



주인공 ‘오토 Otto’는 다정하지 않다. 그럼 냉정하냐, 하면 그렇다고 말하기도 어렵다. 무정한 사람? 아니 그것도 아니다. 그럼 뭐냐? 그저 자로 잰 듯 까칠하고 괴팍하며 철저한 완벽주의자. 곁에 있으면 좀 피곤할 법한 남자. 그냥 딱 봐도 T일 것 같은 남자다. (이쯤에서 나의 몇몇 지인은 누구랑 똑같네, 라고 몰래 중얼거릴지도 모르겠다. 분명히 말하는데 난 F다.)      


고약한 꼰대 & 오지라퍼


오토는 작품 속에서도 고약한 ‘꼰대’로 불린다. 그는 항상 같은 시각에 일어나고 일어난 후에 하는 일도 기계처럼 똑같다. 매일 같은 시간에 산책을 해 동네사람들의 시계 역할을 했던 칸트와 비교해도 결코 뒤지지 않을 정도다.     


오토는 온동네 일을 참견하는 오지라퍼다. 자신에게 엄격한 편인 사람들이 대개 그렇듯, 오토 역시 다른 사람들도 규칙을 준수하며 다같이 평화롭게 살아가길 바란다. 제발 플라스틱은 플라스틱 칸에, 캔은 캔 칸에 분리수거하자. 주정차가 안 되는 곳엔 주정차하지 말자. 내게는 자식 같은 반려견이지만 남의 집앞에 실례를 하는 순간 그냥 동네 똥개가 된다는 걸 좀 알아라. 밧줄 5피트를 샀으면 5피트 값을 내야지 왜 6피트 값을 받느냐고 따지는 게 까탈스러운 일인가. 뭐 그런 식. 이쯤 되면 오토는 물론, 이 동네 풍경이 대충 그려질 게다.     



소냐를 만나기 전 내 삶은 흑백이었어. 소냐는 컬러였지.      


오토의 아내 소냐가 6개월 전에 죽었다. 오토의 인생은 다시 흑백. 게다가 며칠 전 퇴직까지 했다. 이 세상에서 자신의 쓸모를 찾지 못한 오토. 게다가 오랫동안 살아온 동네는 큰 부동산 회사가 사들여 콘도를 짓는다고 집집마다 쑤시고 다니는데, 동네 사람들은 하나둘씩 그 농간에 넘어간다. 모두 다 ‘머저리’라서 도저히 같이 살기가 어렵다. 결국 오토는 자신이 조용히 사라지는 편을 택한다.      


밧줄로 목매달기, 자동차 배기가스로 질식사하기, 총쏘기, 전철 선로에 뛰어들기 등 오토는 4번이나 자살을 시도하지만 모두 실패한다. 그때마다 이런저런 이유로 이웃이나 모르는 사람들이 끼어들어 방해한다. 물론 오토가 자살을 시도했다는 사실조차 모른 채.      


그가 번번이 살아난 데에는 살만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우리 사회가 아직 오토라는 인물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멕시크 이민자, 흑인, 트랜스젠더는 물론 지병을 앓고 있는 노인들, 버려진 고양이까지, 누구에게도 환대받지 못하는 사람들의 손을 잡아준 이가 바로 오토다. 그는 남들과 다르거나 약하다는 이유로, 나와 남을 나눠 차별하거나 무시하지 않는다. 우리는 모두 다르다. 그러나 같이 살아간다. 그러니 그저 사람들이 모여 살 때의 예의와 염치, 상식과 규칙만 잘 지키면 된다는 것이 오토의 생각이다.



영화의 후반으로 갈수록 보는 이의 입가엔 꽃처럼 미소가 피어난다. 특히 오토가 고양이와 손잡고 자는 모습이나 이웃인 마리솔의 딸에게 동화를 읽어주는 장면은 평화롭고 아름답기까지 하다. 살아남아서 주변 사람들에게 그 무심한 배려를 투척하던 까칠한 오토는 결국 죽는다. 그러나! 영화는 해피앤딩이다. 오토의 유언장은 길다. "내가 열심히 살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모아서" 자신의 장례식을 치러달라, 내 차를 누굴 주고, 이 돈은 여기에 저 돈은 저기에 써라... 오지라퍼의 유언장답게 끝도없는 잔소리를 늘어놓는다. 따뜻한 잔소리.


우리 모두는 살아남기 위해 서로에게 다정하다. 그러다 어느 순간 조금이라도 내 삶의 선을 넘어오거나 내게 불이익을 준다 싶으면 바로 으르렁댄다. 그럴 거면 차라리 다정하지나 말지. 그래서 난 다정한 사람이 싫다. 다정함 속에 잠재된 폭력성이 무섭다. 차라리 까칠하고 피곤하더라도 내 앞에서 내 잘못을 지적해 주고, 츤데레처럼 무뚝뚝하게 날 지켜봐주는 오토 같은 사람이 좋다. 물론 귀에 피가 나도록 잔소리는 좀 들어야겠지만, 그래도 그가 오토라면 기꺼이 참을 수 있을 것 같다. ♣          



※ 이 글에서는 ‘오토’에 집중하느라 작품 속 두 명의 사랑스런 여성, ‘소냐’와 ‘마리솔’에 대한 언급을 거의 하지 못했다. 이 아쉬움은 추후 지면을 달리해 달래볼 생각이다.


* 사진 출처 : Daum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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