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앙 : 단팥 인생이야기>
“타인은 단순하게 나쁜 사람이고, 나는 복잡하게 좋은 사람이다.”
우리는 보통 어떤 일이 생겼을 때 상황을 이기적으로 해석한다. 약속 시간에 늦어도 나는 이러저러한 이유로 불가피하게 늦은 거고, 상대는 게으르거나 신의가 없기 때문이라고 치부하는 것처럼 말이다. 평론가 신형철의 말대로, 타인은 단순하게 나쁜 사람, 나는 복잡하게 좋은 사람이다. 이 말은 채플린이 말한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는 말과도 상통한다. 개인이 갖고 있는 구체적인 서사를 알지 못할 때 우리는 타인을 이해하려 들지 않고 내 오해를 이해라 믿고 산다.
“아무런 잘못을 하지 않고 살아가는데도, 타인을 이해하지 않는 세상에 짓밟힐 때가 있어.”
이 말은 영화 〈앙:단팥 인생이야기〉(2015)에 나오는 도쿠에의 대사다. 〈앙:단팥 인생이야기〉는 가와세 나오미가 감독하고, 키키 키린(도쿠에 역)과 나가세 마사토시(센타로 역), 우치다 카라(와카나 역)가 출연한 일본 영화다. 일본의 국민어머니라고 불리는 키키 키린은 한쪽 눈을 실명하고, 암투병 중에 이 영화를 찍었단다. 영화는 작은 도라야키 가게를 중심으로, 나이도 성별도 살아온 환경도 다른 세 사람이 ‘진심’으로 교감하는 스토리를 담고 있다.
도라야키는 두 개의 얇은 빵 안에 팥소를 잔뜩 넣은 일본의 전통 단팥빵이다. 며칠 전 난 지인에게서 서해안고속도로를 지나오다 휴게소에서 샀다며 도라야키를 선물받은 적이 있었다. 바로 요거. 도라야키는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팔 정도로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도 퍽 친숙한 빵이다.
벚꽃이 흐드러진 어느 봄날, 센이 운영하는 작고 허름한 도라야키 가게에 76세의 도쿠에가 아르바이트로 들어오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늙고 손가락도 불편하지만 도쿠에가 만든 팥소는 상상을 뛰어넘는 맛이었고, 한산하던 가게는 도라야키 오픈런이 생길 정도로 생기로 가득찬다.
“단팥은 마음으로 만드는 거야.”
도쿠에는 단팥뿐 아니라 사람과 사물, 자연과도 마음으로 대화하고 교감한다. “세상의 모든 것들은 언어를 가졌다고 믿어. 햇빛이나 바람의 이야기를 들을 수가 있다"고 생각하는 도쿠에. 사회에 의해 냉대받고 격리되었음에도 그녀의 마음은 여전히 열려 있다. 그 마음으로 무뚝뚝한 센은 물론 가게의 단골인 여중생 와카나하고도 따뜻한 유대를 맺는다.
우리 모두는 저마다 ‘복잡하게’ 살아온 스토리가 있다. 얘기할 수 있는 스토리도 있고, 차마 말하지 못하는 스토리도 있다. 말하지 않으면 말 못할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럼 그냥 덮어주면 된다. 따져 묻지 않고 그저 그러려니 받아주면 된다. 그런데 우리는, 그러지 못한다. 타인의 스토리를 캐묻고, 답하지 않으면 내 맘대로 스토리를 지어낸다. 이해와 오해는 그 사이에서 발생한다. 오해는 이해보다 힘이 세다.
도쿠에는 어릴적부터 병으로 인해 오랜 시간 사회와 격리되어 살아왔다. 센은 실수로 사람을 때려 감옥생활을 한 적 있고, 중학생인 와카나는 어머니의 무관심 속에 방치된 아이다. 세 사람 모두 어딘가 불편하거나 상처받은 교집합이 있다. 그래서인가, 도쿠에는 센을 처음 본 순간, 그의 눈빛에서 과거 자신의 눈을 본다. 슬픈 눈.
그날 보름달은 나에게 이렇게 속삭였어.
네가 봐주길 바랐단다. 그래서 빛나고 있었던 거야.
난 이 말이 참 좋았다. 나 또한 누군가 봐줄 때까지 빛나볼까나. 말끔하게 얼굴을 닦고 네가 볼 때까지, 열심히 빛나야지. 나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지만, 네가 있다면 빛날 수 있을 것 같아. 그렇게 나도 널 빛나게 해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셋은 할머니-아버지-딸로 보이기도 하고, 나이를 잊은 채 허물없이 지내는 친구 같기도 하다. 아니 어쩌면 세 명의 인물이 모두 고독한 ‘한 사람’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셋이 함께 있는 풍경은 완벽하게 따뜻하다.
우리 사장님, 잊지 마.
우리는 이 세상을 보기 위해서, 세상을 듣기 위해서 태어났어.
특별한 무언가가 되지 못해도 우리는, 우리 각자는 살아갈 의미가 있는 존재야.
도쿠에의 유언이다. 이 말을 천천히 곱씹으면, 마치 도쿠에가 그 투박한 손으로 내 등을 토닥거리는 것 같다. 괜찮아. 토닥토닥...
살다 보면 안다. 내가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 그저 보통의 사람으로 살아가기도 벅차 매일 끙끙댄다는 걸 안다. 그래도 괜찮아. 토닥토닥...
도쿠에의 격려에 내 맘은 따뜻하고 달콤한 팥소처럼 말랑말랑해진다. 내가 특별한 무언가가 되지 못해도 여전히 이 세상은 아름답고 그래서 살만하다. 보고 듣고 살아있다는 게 참 고마운 순간들. 서로의 안부를 묻는, 다정한 사람들이 곁에 있다는 걸로도 충분하다. 혼자서는 빛나지 못하는 별처럼, 서로가 서로를 환하게 빛내면 되니까.
서두에 인용한 신형철의 말은 이후, “타인은 단순하게 나쁜 사람이고, 나는 복잡하게 좋은 사람인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대체로 복잡하게 나쁜 사람이”라고 수정된다. 나는 이 말을 다시 수정하고 싶다. “우리 모두는 대체로 복잡하게 가치있는 사람들이다.”
영화는 벚꽃이 만개하며 화면을 가득 채운 봄날에 시작하여 다시 봄까지, 사계절의 아름다움을 터질 듯 충만하게 보여준다. 또 울퉁불퉁한 손으로 팥소 만드는 오~~랜 시간을, 눈으로 보일 정도로 생생하게 담아낸다. 이토록 아름다운 세상, 우리도 팥처럼 진심을 다해 천.천.히.느.리.게.익.어.가.면, 우리의 생도 그렇게 달콤해지지 않을까. ♣
* 사진 : Daum 영화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