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일리노이
위스콘신주에서 차를 타고 일리노이주의 시카고로 이동했어요. 시카고는 특별한 역사가 있는 도시예요. 예전에 아주 큰 불이 나면서 도시 전체가 타 버리는 슬픈 역사가 있는 곳이에요. 피해가 너무 커서 복구하기 어려운 상황이었기 때문에 그 위에 도시를 다시 건설하기로 했대요.
그래서 시카고에 도착했을 때 차도가 갑자기 지하의 세계로 연결됐다가 지상으로 나가는 이중구조를 이해할 수 있었어요. 지하는 슬픈 기억이 있고 지상은 새로운 세상이 펼쳐진 구조였어요. 하지만 도시 재개발 프로젝트를 통해서 시카고는 건축의 도시로 거듭나게 되었어요. 저는 고층빌딩을 좋아해서 이런 이야기가 있는 시카고에 대한 기대가 컸어요.
처음 미국에 와서 학교를 다니지 못할 때 시간을 채우기 위해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는데, 뉴욕의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을 시작으로 스페이스 니들, 제다 타워 등을 그리면서 혼자 Skyscraper 그리기 프로젝트라는 이름을 붙여 작업했었거든요. 덕분에 빌딩 그리기는 제 취미활동이 됐어요. 그래서 고층 빌딩을 아직도 좋아하고요. 스트레스를 받을 때 그림을 그리면 머릿속이 정리가 돼서 좋아요. 엄마가 시킨 것도 아니고, 공부랑 관련 있는 것도 아니어서 더 기분 좋은 시간이에요. 사람은 잘 못 그리고 자를 대고 건물을 그리는 걸 좋아하는데 그런 저를 보고 건축가가 되면 잘할 것 같다고 응원해 주시지만 결론은 건축가도 첫걸음은 “수학”이라고 마무리할 때가 많아요. 그래서 제 꿈은 건축가는 아니에요.
건축가가 되는 것이 꿈은 아니지만 좋아하는 주제가 있는 곳이라 시카고에 가는 것이 기대됐어요. 도착하면 빌딩들을 감상할 수 있는 유람선을 타기로 했는데 비로 인해 취소가 될까 봐 걱정이 됐어요. 다행히 취소되지 않아서 비 오는 날 배를 타고 높고 독특한 빌딩들을 감상하는 멋진 장면이 완성되었지요. 가이드 아저씨가 아무도 없는 이층에서 비를 맞으며 열정적으로 설명을 하는 모습이 잊히지 않는 투어였어요. 엄마는 춥다고 안쪽에 자리 잡고 있으셨지만 아빠와 저는 배의 뒤쪽에 자리를 잡고 빌딩 속을 헤엄치는 기분을 만끽했지요. 그 분위기가 너무 좋아서 아빠와 함께 시카고에 다시 오는 계획을 짜기도 했는데 아직까지 이루어지지는 않았어요. 늘 여행을 이끌어 주느라 바쁜 모습의 아빠인데 시카고의 배에서는 여유로움이 느껴졌어요. 아빠가 좋아하는 맛있는 식당도 아니고, 비행기도 없는데 무엇 때문에 아빠는 그 시간을 좋아하셨던 걸까요? 아마 다시 이곳에 오는 여행을 계획하면서 설렜던 것 같아요. 우리는 대륙횡단열차를 타고 시카고 유니언 스테이션에 오는 이야기를 했거든요.
트럼프 타워도 보고, 건축센터도 구경했어요. 비 오는 거리를 모자로 뒤집어쓰고 다니는 시간이 정말 좋았어요.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면서 반짝이고 있는 거리가 빗물로 더욱 반짝인다고 엄마는 또 사진을 지나치게 많이 찍기 시작했지만 이번에는 저도 좋았어요. 비는 우리 가족을 더욱 신나게 만들었어요.
비를 뚫고 점심으로 자리 잡은 식당은 시카고 피자! 시카고 딥 피자는 워낙 유명해서 기대가 컸지만 토마토 맛이 너무 강해 실망도 컸어요. 하지만 의외의 메뉴를 발견한 곳이기도 해요. 이번에도 역시 아빠의 한식타임이 돌아와서 밤늦게 찾아간 곳에서 엄마는 어린 시절에 좋아했던 메뉴를 발견했어요. 이름은 “염소탕” 귀한 음식이라 자주 먹지 못했지만 어릴 적 엄마가 좋아했던 음식이라고 시키셨어요. 저는 궁금해서 한 숟가락 얻어먹었는데 멈출 수 없던 맛이었어요. 이 여행 후, 다시 먹은 적은 없지만 Goat Soup이라니, 독특하면서도 익숙한 맛이 계속 생각이 나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시카고에서 우리가 꼭 해야 할 미션이 하나 있었어요. 어둠을 지나 캐빈의 집을 찾아가는 것이었지요.
나에게 캐빈의 집은 언젠가 꼭 방문하고 싶었던 곳이에요. 영화를 보는 것을 좋아해 가끔은 엄마한테 혼나기도 하는데 나 홀로 집에를 볼 때는 혼난 적이 없는 영화예요. 늘 크리스마스날 밤이었기 때문이에요. 나 홀로 집에를 볼 때마다 감동하게 되는 멋진 미국집. 영화를 끝까지 보다 보면서 그 집의 주소를 알게 되었고 언젠가 가보자고 늘 이야기했었어요. 그리고 드디어 그곳에 갈 기회가 생긴 거예요.
겨울이라 밤이 일찍 찾아와 어두워졌을 때 캐빈네 동네에 도착했어요. 캐빈이 도둑을 맞이할 때 나오던 캐럴을 틀고 주택가라 속도를 줄이며 접근했지요. 지금은 평범한 가정집이라고 해서 조심스럽게 찾아갔어요. 마치 우리가 도둑일당이 된 것처럼… sneaky 하게…….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요! 정말 끊임없이 사람들이 찾아와 사진을 찍고 갔어요. 우리 가족도 그중에 한 팀이었고요. 생각보다 거대한 주택은 아니었지만 우리 집에 비하면 정말 큰 집이긴 했어요. 때마침 크리스마스 장식까지 되어 있어서 내일 아침이면 이 집 앞에서 공항으로 출발하는 캐빈네 가족이 있을 것 같았지요. 밝은 시간 때 풍경도 궁금해서 다음날 다시 방문하기로 했어요. 주말아침 다시 방문해 보니 마을에는 산책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보였어요. 날씨가 춥지만 캐빈처럼 모자를 쓰고, 장갑을 챙겨서 가족들이 동네를 산책하는 모습이 내가 살고 있는 산호세와는 다른 모습이었어요. 우리 동네는 무조건 차로 이동하거든요. 엄마는 계속 이곳의 모습이 좋다고 이야기했고, 이번에는 저도 엄마의 투덜거림에 동참했어요. 느낌이 좋은 곳, 캐빈같이 재밌는 친구가 많이 살고 있을 것 같은 마을이었거든요. 참고로 도둑들이 탐낼 만큼 멋진 집이 많았지만 다행히 도둑처럼 보이는 사람은 없었어요. 돌아 나오는 길에 캐빈이 위장술을 펼쳤을 것 같은 교회도 보였고, 굉장히 높은 곳에 우뚝 자리하고 있는 교회가 인상적이어서 들렀다 왔어요. 종교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내부에 들어서니 경건해지고 마음이 차분해졌어요. 도둑 같은 사람이 되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지요. 하지만 캐빈 같은 용기를 낼 자신이 없었어요. 대신 휴대폰이 내 손에 있다는 것에 안도가 됐어요.
‘엄마, 아빠 휴대폰을 사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