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대역 11번 출구
스마트폰 속 세상은, 오프라인보다 훨씬 빠르게 사람을 엮는다. ‘데이팅 어플’은 이제 20대뿐 아니라 30대, 40대까지 연애의 출발점이 되었다. 화면 속엔 수십, 수백 장의 사진이 스쳐간다. 웃는 얼굴, 여행지에서 찍은 전신샷, 반려동물과 함께 찍은 셀카… 짧은 자기소개에는 나이, 직업, 취미가 적혀 있다. 마음에 드는 사진이 있으면 ‘좋아요’를 누르고, 상대방이 받아들이면 채팅이 시작된다.
어플 속에서는 사귀고, 심지어 동거하는 것도 어렵지 않다. 하지만 정작 서로의 ‘본명’조차 모른 채 만남을 이어가는 경우도 많다. 본적, 가족 관계, 빚 여부, 전과 기록… 그 모든 건 프로필 뒤에 감춰진다.
편리함은 매혹적이지만, 그만큼 위험도 가까이에 있다.
누군가는 이곳에서 사랑을 찾지만, 누군가는 거짓을 심고 수확한다.
김민서(가명·29)는 퇴근 후 집에 돌아와 무심코 어플을 켰다. 회사-집-회사로 이어지는 단조로운 생활 속에서, 대화가 필요했다. 스크롤을 내리다 멈춘 건 ‘준호’라는 닉네임의 남자였다. 사진 속 그는 회색 셔츠에 단정한 머리, 커피잔을 들고 있었다. 프로필에는 ‘프리랜서 번역가 / 여행·독서·와인’이라고 적혀 있었다.
민서는 ‘좋아요’를 눌렀다.
잠시 후, 매칭 알림이 울렸다.
“안녕하세요, 민서 씨. 오늘 하루 어떠셨어요?”
첫 메시지는 부드럽고 단정했다.
그날 밤, 채팅은 두 시간 넘게 이어졌다.
책 얘기, 여행지 얘기, 어린 시절 추억까지.
민서는 오랜만에 ‘누군가 나를 궁금해하는 느낌’을 받았다.
대화는 매일 이어졌다.
아침엔 “출근 잘 하셨어요?”라는 안부,
점심엔 “밥은 꼭 챙겨 드세요”,
퇴근 무렵엔 “오늘 저녁에 전화해도 될까요?”라는 메시지.
일주일 후, 그는 만남을 제안했다. 강남의 한 카페에서 마주 앉은 그는 사진 속 그대로였다. 말투는 차분했고, 대화는 끊기지 않았다. 그는 여행 이야기를 하다, 자신의 휴대폰 속 사진들을 보여줬다. 유럽 골목길, 와이너리, 공연장… 민서는 ‘이 사람은 진짜 여유 있는 삶을 사는구나’라고 생각했다.
만남은 일주일에 두세 번, 그러다 거의 매일로 늘어났다. 두 달쯤 되었을 때, 그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사실 집 계약이 곧 끝나요. 다음 계약하려는데 보증금이 너무 비싸서…
혹시 우리가 같이 살아보는 건 어때요?
저는 민서 씨랑 있으면 마음이 편하거든요.”
민서는 당황했지만, 이미 마음이 많이 기울어 있었다.
그의 생활 태도는 부드럽고 안정적이었다. 주말마다 같이 장을 보고, 밥을 해 먹으며, 그는 자주 ‘미래’ 얘기를 꺼냈다.
“우리 나중에 제주도로 여행 가자”
“결혼식은 소규모로 하면 어때요?”
그의 말은 설레게 했고, 민서는 ‘함께 사는 미래’를 그려봤다.
동거는 순조롭게 시작됐다.
그는 아침마다 커피를 내려줬고, 가끔은 도시락을 싸주기도 했다. 퇴근 후엔 함께 요리를 하거나, 넷플릭스를 보며 웃었다. 민서는 그가 집안일을 나눠 하는 모습에 더 믿음이 갔다.
주변 친구들은 “만난 지 얼마 안 돼서 동거는 위험하다”고 했지만,
민서는 고개를 저었다.
“겪어보면 알아. 이 사람은 달라.”
동거 6개월째, 민서는 몸의 변화를 느꼈다. 병원에서 받은 결과는 ‘임신 6주’. 민서는 떨렸지만,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 우리 아기 가진 것 같아.”
잠시 침묵 후, 그는 크게 웃었다.
“진짜? 우리 결혼하자.”
그날 그는 꽃다발을 들고 돌아왔다.
둘은 함께 초음파를 보며 손을 꼭 잡았다.
민서는 이제 두 사람의 미래가 더 단단해질 거라 믿었다.
그러나 그 믿음은 오래 가지 않았다.
병원을 다녀온 지 나흘 후, 그는 외출을 나갔다.
“금방 다녀올게. 회사에 서류 좀 전해야 해서.”
그게 마지막이었다.
저녁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았다. 전화는 꺼져 있었고, 메신저는 읽히지 않았다. 다음날, 그의 SNS에는 다른 여성과 찍은 사진이 올라왔다. 위치는 부산의 한 호텔이었다.
민서는 손이 떨렸다. 같이 산 집의 계약자는 그가 아니라, ‘모르는 이름’이었다. 보증금도 그의 돈이 아니었다.
민서는 그를 찾기 위해 어플 운영사에 문의했지만,
개인정보 보호를 이유로 거부당했다. 렌트했던 차량은 이미 반납됐고, 전화번호는 해지 상태였다.
경찰서 민원실에서 수사관은 말했다.
“동거 중에 생긴 임신과 잠적은 형사사건으로 다루기 어렵습니다. 다만 친자확인소송과 양육비 청구를 위해 신원을 특정해야 합니다.”
민서는 눈물이 났다.
이건 단순한 연애 문제가 아니었다.
아이가 있었고, 그 아이의 인생이 걸린 일이었다.
교대역 11번 출구.
민서는 변호사와 함께 법원으로 향했다.
“신원불상 남을 상대로 소송을 하려면, 이름과 주민번호를 확보해야 합니다.
혹시 주민등록등본, 운전면허, 여권 사본 같은 거 본 적 없나요?”
민서는 고개를 저었다.
변호사는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
“그러면 먼저 소재 파악을 위한 소송부터 해야 합니다.
시간이 오래 걸릴 거예요.”
이 사건은 뉴스에 나올 만큼 큰 범죄가 아니다.
그러나 민서에게는 모든 것이 달린 문제다.
아이의 아빠를 찾는 일, 양육비를 받을 수 있는지 없는지,
아이에게 ‘아빠’라는 존재가 기록될 수 있는지.
어플 속 프로필 한 장으로 시작된 사랑은,
현실 속에서 너무 무거운 값을 요구하고 있었다.
법원 계단을 내려오며, 민서는 배를 감싸쥐었다.
봄바람이 불었지만, 그 바람은 조금도 따뜻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