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자고 일어났습니다(23.1.21/토)

어느 우울증, 불안장애 환자의 일기​

by 이음

<그림자가 무서워요>


구정 잘 보내고 계신가요?

날씨는 까치까치 설날인만큼 적당히 춥고 맑은 하루였는데요. 올해는 유난히 명절음식하는 집이 없네요. 이제는 전 부치는 냄새도 고향의 냄새가 돼버렸습니다.


얼마 전에 진단서 발급받을 일이 있어서 병원을 갔는데요. 선생님 말씀이..


“환자분은 불안장애, 공황장애, 범불안장애 다 있는데요”

“어떻게 써 드릴까요?”


“네. 그냥 제일 심각한 걸로…”


발급받은 진단서에는 ‘범불안장애’ 하나가 쓰여 있었어요. 알고 있는 것과 확인하는 것의 차이라고 할까요. 왠지 기분이 별로더라고요. 범불안장애를 네이버에 검색해 보면 해석이 살짝 찌무룩하거든요.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마치 내가 문제인 거 같은 느낌이랄까요. 제가 선생님께 듣기로는 불안장애가 장기화되면서 악화되면 범불안장애가 된다고 들었거든요.


사태의 심각성을 다시 한번 인지하며 올해에는 꼭 나아보자는 마음을 먹었습니다. 당장 해결할 일들도 많은데 체력이 안되니 어렵더라고요. 일이 있어 나가다 보니 매일 이천보, 삼천보를 연속으로 걷게 되었어요. 아무래도 운전을 하고 다니면 걸을 일이 없잖아요. 따로 시간을 내서 걸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일단 하루 7000보 이상의 목표를 정해 놓고 걷기로 했어요. 그리곤 식후 두 시간 안에 15분씩 걷기로 했고요. 저녁을 먹고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돌돌 말고 굴러 나왔지요.


밤에 걸어 보셨나요?


엄청 엄청 무서워요..

심심해서 유튜브 공포라디오를 듣고 있었어요. 단지엔 가로등이 많잖아요. 그러면 그림자가 여러 개가 생기겠죠? 앞에도 옆에도 뒤에도요. 주변시야로 이 세 그림자가 저랑 같이 걷는 거예요. 귀신 이야기를 들으며 가고 있는데 그림자가 따라오는 느낌이…


상식적으로 생각하지 마시고요.


그냥 주변 시야에 세 그림자가 나랑 같이 가시면 안 무서우신 가요? 전 무섭더라고요.


그래서 현관 앞에서만 종종 거리며 20분을 걷고 있었어요. 멀리서 귀가하시던 윗집 할머니가 저를 보고 오시려다 흠칫 놀라셨나 봐요. 갑자기 뒤로 한 발짝씩 뒷걸음질 치시더라고요. 머리를 둘둘 말은 펭귄 같은 사람이 뒤뚱이며 현관 앞을 반복해서 걷고 있으니 그럴 만도 하셨겠죠? 멈춰 서서 저를 지켜보고 계시길래, 저희는 무언의 공포를 주고 받았습니다.


전 제 그림자가 무서워서 현관 앞만 걷고 있고, 윗집 할머니는 머리까지 둘둘 말은 이상한 사람이 단지 앞을 배회하는 것 같아 무서우셨나 봐요. 제가 얼른 반대 방향으로 뒤똥이며 달아나니 그때서야 박차를 가해서 현관으로 얼른 들어가셨어요.


재밌게도 어둠이라는 공포가 주는 동상이몽이었습니다. 나는 내가 무섭고, 할머니는 제가 무섭고요.


암튼 저는 오늘 알게 되었습니다. 제가 밤에 잘 안 돌아다니고, 약속도 안 잡는 이유가 사실은 제가 쫄보였기 때문이라는 것을요.


밤은 고요하고 낭만적이지만,

아직 집 밖은 무서운 나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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