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자고 일어났습니다(23.2.23/목)
어느 공황장애, 불안장애 환자의 일기
어제는 신촌 세브란스를 갔다가 정신과를 다녀왔다. 나갈 때는 상큼하게 나갔는데 9000보를 걷고 들어오니 불어 터진 오뎅 같아졌다. 어제 오전 하늘은 푸르고 예뻤다. 같은 길을 지나는데도 목적지가 다르니 느낌도 달랐다. 역시 사유의 확장은 시선의 확장에서부터 시작되는 게 맞나 보다. 길을 나서니 렌즈와 엔진이 막 돌아가기 시작했다. 이어폰도 필요 없이 사람들을 보는 게 더 좋았다.
지하철이 도착했다.
앗싸~
빈자리가 있다.
‘왠열’하며 기분 좋게 앉아서 책을 펼쳤다. 나는 지하철을 탈 때마다 책을 읽었다. 2년 전만 해도 책 읽는 사람들이 종종 보였는데 오늘 보니 다들 핸드폰만 보고 있었다. 그래도 나는 다시 예전으로 돌아 간 거 같아서 기분이 참 좋았다. 그때 내 옆자리에도 누군가가 앉았다. 그분은 앉자마자 바빠 보였다.
“부스럭부스럭”
“바스락 쩔 그랑 부스럭”
“바시락 싹싹 싹싹“
‘흠, 살짝 신경이 쓰였지만 공공장소이니.. 그럴 수 있지, 그래 원래 이런 게 지하철이지 ‘하며 책을 보려 애썼다.
옆에 분은 가방 잡동사니, 영수증 같은 거를 꺼내서 가방 정리를 하고 있었다. 무언가 부스럭부스럭 한참을 꺼냈다 넣었다를 반복하더니.. 갑자기 가방에 있는 물건을 다 꺼내서 정리를 하기 시작했다.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었다.
‘그래도 뭐.. 주변 소음에 집중하지 못하면 내 집중력이 문제지‘하며 다시 읽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분이 이번에는 사채업자인가 싶게 만원 다발을 꺼내시더니 침을 퉤 퉤 뱉으며 돈을 세기 시작했다. 그리곤 봉투마다 돈을 나눠 넣었다. 속으로 ‘아, 이분 뭐지 재밌는 분이네..‘하고 있었는데 그분에게 전화가 왔다.
“아니 돈이 왜 그렇게 많이 드냐고 “
“씹 아놔, 미치겠네 “
“병 응 아놔 진짜 죽고 싶나”
아, 웃으면 안 되는데 옆에 분 컨셉이 너무 웃겼다. 욕을 하고 싶은데 첫 글자만 뱉고 참는 모습에 나는 빵 터질 뻔했다. 웃음을 속으로 참으니 얼굴 근육이 타이어처럼 부풀었다. 자세를 조금 비튼 뒤 허리를 숙이고 책으로 얼굴을 덮고 무음으로 꾹 참고 웃었다.
이제 조금 조용해졌나 싶은데 맞은편 옆 자석에 할머니 무리에서 반상회가 열렸다. 누가 보면 옛날 비둘기호에서나 보던 풍경 같은 모습이었다. 워낙 여러분이 동시에 말씀하셔서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는데 할머니들은 모두 기분이 좋아 보이셨다. 확실히 3호선 끝에서 타서 그런지 시골 같은 풍경이 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웃고 있었다. 재밌었던지라 사람들을 보며 글 쓸 게 없을까?’하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때 마침 바턴이라도 이어받듯이… 이번에는 내 옆에 아저씨가 작년 추석에 친구와 싸운 이야기로 통화를 시작했다. 쩌렁쩌렁하게 소리를 지르시며 억울함과 속상함을 토해 냈다. 그분의 큰 목소리가 내 귀에 대고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나는 하는 수없이 90도로 엎드려서 책을 읽었다.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저마다의 사연을 가지고 다른 목적지로 향하는 사람들이 잠시 한자리에 모였구나.
같은 시간을 공유하고 있는 듯 보이지만 아무도 서로를 공유하고 있지 않다. 그저 무관심한 시선으로 바라볼 뿐이다.
난 그들을 바라보며 기분이 좋아졌다.
우리의 삶이 중국집 자장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때론 불기도 하고 배달하다가 쏟아지기도 한다. 테이블에 이쁘게 놓일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다반사다.
그래 나만 인생이 아픈 게 아니고, 나만 힘든 게 아니지.
우린 모두 경기 중인 거야. 승자가 없는 경기. 우리 인생에는 패자도 없고 승자도 없다. 정답도 없고 오답도 없다. 그저 우리가 걷는 길이 풀이이고 마지막 도착한 곳이 정답일 뿐이다.
어차피 출발선부터 다른 경기이다. 모두가 사칙연산을 이해할 수 있게 태어나는 건 아니지 않은가.
나는 나의 집중력을 테스트하기라도 하듯이 정말 책을 열심히 읽었다. 그런데 기억나는 건 주변 시야에서 모집한 정보들뿐이었다. 역시 인간은 자극적인 것에 주변이 끌린다.
신촌 세브란스 병원에 도착했다. 이곳에 오면 웃던 얼굴도 숙연해진다. 나도 젊은 환자인데, 나보다 어린 환자들이 수두룩 한 걸 보고 괜찮은 척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안과는 또 암 센터 끝에 있어서 중증 환자분들을 거쳐 가게 되어 있다.
아이들이 휠체어를 타고 있는 걸 보면.. 나도 자식 있는 부모이기에 마음이 더 아프다. 아픈 사람이라고 동정하고 그러면 안 되지만, 아프고 싶어 아픈 게 아닌 걸 알기에, 밤 잠 못 자고 애태우는 부모 맘을 알기에, 고사리 같은 팔에 혈관을 찾는 고통을 나도 겪어 봐서.. 더 맘이 그랬다.
사람은 자꾸 보고 부대껴야 세상과 연결되나 보다. 상관없는 사람들이라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에 공간이 확장되는 걸 느꼈다. 공감하는 만큼 이해할 수 있고, 공간의 크기만큼 배려할 수 있다. 나는 그 좁은 지하철 안에 모인 사람들을 보며 반가운 동질감을 느꼈고, 병원의 사람들을 보며 아빠에 대한 연민을 확장했다.
역시 확장은 좋은 것이다. 가슴이 확장되면 옹졸함이 웅대해진다. 사람이 옹졸하면 자신이 가장 힘들지 않은가. 웅대까지는 아니더라도 옹졸까지는 아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