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자고 일어났습니다(23.7.16/일)
어느 우울증, 불안장애 환자의 일기
<우울증_편안한 오후>
오늘은 비도 저의 편인 날이었어요. 오랜만에 외출을 하니 우산을 필 듯 말듯하게 비가 왔어요. 운이 좋았지요.
나와 맞는 사람을 만나는 건 참 행복한 일이잖아요. 점심을 먹으면서도 긴장되지 않아서 좋았어요. 원장샘은 원장님과 수련생의 관계가 아니라 그냥 사람을 좋아하시는 분 같았어요. 전 그게 좋더라고요. 그게 사실 힘든 세상이잖아요.
다녀와서는 한숨 푹 자고 일어났어요. 최근 들어 병원, 은행, 볼일 외엔 가장 오래 앉아 있고 말한 날이었거든요.
분명 많은 이야기가 오갔는데 기억나는 게 별로 없어요. 참 우습죠. 전 분명히 잘 듣고 있었어요. 그것도 아주 흥미롭게요. 열심히 대화를 주고받았는데, 제가 꿈속에서 메모리카드에 정리를 해두고 왔나 봐요.
‘어’ 생각해 보니 오늘은 두통 약간, 새벽의 약한 과호흡 외에 아픈 건 없었어요. 기적 같은 날이죠. 하루종일 이렇게 건강한 날이
오다니요. 그냥 신기합니다. 나에게도 안 아픈 날이 올 수 있다니, 생각하니 뭉클하네요.
밥을 먹고 카페에 갔어요. 들어가자마자 한 벽면이 책으로 가득한 거예요. 얼마나 부럽던지요. 저의 로망이었거든요. 벽면에 책을 가득 쌓아서 골라보는 거요. 저에겐 생각만 해도 꿈같은 일이죠. 그곳은 식사와 차가 같이 되는 카페였어요. 원장샘의 지인이 하시는 곳이라 인사를 드리곤 나중에는 담소도 같이 나눴어요. 그곳에 앉아서 카페를 둘러보는데 사장님의 손길이 보이더라고요. 와인잔 하나하나, 티포트 하나하나.
고르고 골랐을 좋은 책들, 편히 머물다 가도 된다는 사장님의 마음. 쉽지 않은 일이죠. 요식업은 테이블 회전으로 매출을 계산하잖아요. 책을 이렇게 많이 갔다 놓기엔 고민이 있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세대차이도 있고, 요즘 워낙 별의 별일이 다 있으니깐요.
벽면의 가득한 책은 누군가를 기다리는 사람에 대한 배려잖아요.
책을 읽으며 나를 기다리는 모습..
크~~~ 낭만적이지 않나요?
저라도 저를 기다리는 분이 책을 읽고 계시면 참 좋을 거 같아요. 그래서 카페 사장님 마음이 참 넉넉하신 분이구나 생각했어요.
음악을 들으며 카페를 둘러보는데 갑자기 이런 생각이 올라왔어요.
“이곳을 다녀간 사람들의 이야기는 무엇이 있었을까?”
“참 많은 시간이 함축된 공간이구나~”
카모마일을 마실 때 모래시계가 다 내려가면 마시라고 하시는 거예요. 예쁜 모래시계를 바라보다 ‘너 하나 사고 싶다’ 생각했어요. 모래시계가 마치 시간이 흐르는 것 같잖아요. 전 바라보고 있으니깐 사념도 흐르는 거 같더라고요. 그래서 하나 살까 심각하게 고민 중이에요. 자꾸 사들이면 미니멀 라이프가 어려운데, 이놈의 물욕이란~
따뜻한 티포트를 어루만지고 차를 마시고 있었어요. 그때 조용하게 바라보는 영혜가 말을 건네왔어요.
“편안하니?”
“응, 나 지금 굉장히 편해~”
“숨은? “
“감정은?”
“응 다 좋아, 편안하고 평온해 “
“그냥 3년 전처럼 기분 좋게 온 느낌이야”
“근데 갑자기 그건 왜 물어? “
“한편으론 걱정도 되고 “
“한편으로 네가 평온하다면 잘 기억하라고 “
“왜 걱정돼?”
“응, 니가 힘든데 참고 있을까 봐 “
“넌 티를 안 내잖아 “
“응, 지금은 아니야”
“정말 편해”
“그리고 왜 기억해야 해”
“응, 우울증은 자각도 치료야”
“평온이 한 번 찾아왔다는 건 두 번도 찾아올 기회가 있다는 뜻이지 “
“약도 치료가 되지만 결국은 조화야 “
“너의 노력이 필요해, 바로 이런 자각”
“너 지금 이 팝송이 좋지? “
”카모마일 티포트에 온기도 좋고? “
“못 보던 책이 많으니 책 제목을 계속 읽고 있잖아? 흥분되지? “
“사장님의 세계관이 신비롭지? “
“그런 좋은 느낌들을 한 번씩 자각하고 내면의 감정 속에 흘려보내”
“그러면 그 느낌들이 계속 흐르고 흘러서 너의 아픔도 깨끗한 시냇물처럼 정화될 거야 “
“이제 다 와가“
“지치지만 말고, 나만 믿고 따라와 “
“내가 너잖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