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철, 고구마수프

썬코뉴어

by 그레텔 그림



달갑지 않은 일상 노동의 단연 일 순위는 끼니였다. 그것은 요리와 엄연히 다른 차원의 일이다. 끼니란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생존을 위해 처리해야 하는 무보수의 단순 노동일뿐, 그 안에서 즐거움이나 배움 같은 건 없었다. 무언가를 하다가 식사 때가 되어 마지못해 자리에서 일어날 때면 엉덩이는 천근만근. 익숙한 메뉴 몇 개로 돌려 막다가 그것조차 막히는 날 냉장고 앞에 서있으면 절망 어린 짜증이 차올랐다. 도대체 언제쯤 이 일에서 해방될까. 왜 식사 대용 알약은 나타나지 않는 걸까. 끼니는 그저 꿈꾸는 삶을 훼방하는 생존형 허드렛일이었다.



여느 때처럼 냄비에 물을 끓이고 재료를 접시에 놓고 썰었다. 또각또각, 탁탁, 쟁강쟁강, 보글보글. 유난히 소리 하나하나가 귀에 또렷하게 꽂혀 들어왔다. 익숙한 동선 위의 움직임이 몸을 넉넉히 감싸는 옷처럼 편안하게 느껴졌다. 찬찬히 움직여 만들어낸 따뜻한 음식은 배고픔뿐 아니라 다른 종류의 싸늘한 허기까지 달래주었다. 효과는 재빠르고 확실했다. 작은 자극에도 하늘하늘 쉽게 뒤흔들리는 나의 감정을 이 노동이 붙들어주고 있음을 깨달았다. 반복되는 끼니를 시시포스의 바위라고 믿었던 나날에는 매일 놓쳐버린 기회였다. 예전의 허드렛일을 몸과 마음을 돌보는 기술로 다시 익히고 싶어졌다.



크러시드 레드 페퍼, 라발렌 시 솔트, 파르미자노 레자노 치즈, 베샤멜 소스...... 도서관에 들른 김에 요리책 한 권을 집었지만 이런 어지러운 말들로 가득했다. 나의 요리에서는 무엇이 중요하지? 나는 낯선 외국어들 대신에 ‘제철’을 선택하기로 했다. 우선 동네 마트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식재료들과 친해지고 싶었다. 안다고 여겼지만 알지 못하는 제철 재료들이 궁금해졌다. 잘하겠다고 너무 애쓰면 마음이 오래가지 못한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그래, 가을이다. 고구마가 돌아왔다. 요즘 세상에 고구마는 사시사철 구할 수 있겠지만 그래도 제철은 제철이다.


내겐 너무 거창한 요리책이었지만 당장 만들 수 있는 게 하나쯤은 있겠지 싶어 후루룩 넘겨 찾은 것이 고구마수프였다. 주말 홈브런치에 딱 맞는 가벼운 시도. 고구마를 찌고, 잘게 으깨고, 우유를 넣어 끓이다가 치즈를 넣어 녹였다. 올리브 오일, 소금, 후추로 간을 하고 ‘크러시드 레드 페퍼’ 대신 건고추를 부숴서 솔솔 뿌렸다. 간단하게 하려고 블렌더 대신 포크로 으깬 탓에 덩어리 질감이 뭉글뭉글했다. 오뚜기 크림스프가 나은 것 같다는 반려인의 평가는 살짝 무시해줬다. 중요한 건 내 끼니 노동이 일상을 사랑하는 기술로 조금 자라났다는 사실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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