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지 않는 새

알비노 왕관앵무

by 그레텔 그림




몇 해 전에 <소년이 온다>를 읽은 뒤 책에 너무 아파서 한동안 한강의 다른 작품을 읽지 못했다. 그러다 친구의 열정적인 추천으로 <작별하지 않는다>를 펼쳤다가 조금 후회했다. 힘든 이야기에서 쉽게 무너지는 내 나약함이 못마땅했다. 읽기를 멈추고 싶었지만 끝내 멈추지는 못했다. 아프지만 아름다운 문장들이 나를 놓아주지 않았고, 무엇보다 그것은 고립된 작은 새를 구하러 가는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가는 줄을 손가락 끝으로 움켜쥐듯 간절했다. 눈보라 치는 섬, 길이 끊긴 외딴 목공방에 홀로 남겨진 새가 무사히 구출되기를 바랐다. 그러나 그 바람은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다시 읽기로 마음 먹은 뒤에도 한동안 책을 펼치지 못했다. 줄거리는 거의 희미해졌음에도, 독서의 고통만은 또렷했다. 그래도 주변에서 만나는 새들을 하나씩 찾아보기로 한 이상 이 소설을 피할 수는 없었다. 새가 등장하는 장면만을 더듬어 페이지를 넘겼다. 새의 죽음 뒤에서 기다리고 있을 거대한 고통의 서사를 다시 마주할 자신이 없어서였다.



아마는 어떤 종의 새였을까. 온몸이 하얀 작은 앵무새였다면 알비노 왕관앵무였을까. 작가는 새를 키우거나 사랑해 보았을까? 그렇지 않다면 어깨 위에서 스웨터를 뚫고 전해지는 가칠가칠한 여린 발의 감촉, 거의 무게가 없음에도 자리를 떠난 뒤에 사라지지 않는 무게감, 뜨거울 리 없는데도 살갗에서 가시지 않는 온기, 그리고 자세히 보려고 눈을 맞추기 위해 고개를 외트는 새의 몸짓까지. 이렇게 세세하게 알 리가 없을 것이다.



처음 읽을 때 나는 싸늘하게 누운 아마의 모습에서 무너졌다. 실망에 짓눌려 이후의 이야기에 제대로 머물지 못했다. 두 번째 읽고서야 소설의 제목이 내 안으로 들어왔다. 작은 새와의 작별 옆에 또 다른 거대한 작별을 겹쳐 놓고, 떠나간 이들과 끝내 작별하지 않겠다고 거듭해 선포하는 목소리였다. 다시 살아 돌아온 아마를 이제야 보았다니. 물을 마시고, 삐이 울고, 좁쌀을 쪼아 먹고, 따뜻한 발을 들어 손바닥 위로 올라왔다는 아마를 알아보지 못했다니. 내 그림 속 아마는 죽지 않고 초봄의 프리지어 위에 앉아 있다.



절실한 태도와 의지로 세계를 다시 짓는 일. 그것은 문학적 은유일뿐 아니라, 삶의 기술이기도 하다. 이미 일어난 사건들을 어떻게 기억하고 간직할 것인가를 선택하여 지금이라는 흐름으로 이어가는 일이다. 거대한 역사적 사건뿐 아니라 한 사람이 오늘을 살아가는 일에서도 마찬가지다. 나는 이 어려운 기술을 조금씩 연습해 나가야 한다.







#내 손가락 위의 새

#토요 그림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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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