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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eon Apr 21. 2023

난 차가운 도시여자인데

왜 따뜻한 동물의 왕국에 사는 느낌이지?

난 0살부터(만나이 익숙해지자) 복잡한 서울의 아파트에 살았고 2살부터 역시나 복잡한 주택가에 살다가 4살부터 다시 아파트에 살고 고등학생 때 다시 복잡한 주택가에 잠시 살다가 대학생 때 다시 신도시 아파트에 살았다. 신도시 별 거 없네, 하며 다시 고향인 복잡한 서울 아파트로 돌아와 살다가 영국으로 이민을 가게 되었는데 그때도 조건은 하나, '난 주택 말고 아파트에 살고 싶어.' 그래서 세 군데의 flat에 살다가(영국에선 아파트를 플랏이라고 부른다) 다시 한국에 왔다.

주민등록등본을 이렇게 길게 읊은 까닭은 내가 차가운 도시여자임을 어필하기 위해서다. 연못이 있는 정원이 딸린 2층짜리 주택에 살던 고등학생 때는 혼자 무서워서 벌벌 떨었던 적이 많았다. 2층에서 혼자 집을 볼 때 1층에서 조금만 소리가 나도 빈집에 누가 있는 것 같아서 경찰을 부를까 가까운 곳에 있는 친척을 부를까 고민하던 적이 많았다. 실제로 친척 어르신이 집에 찾아와서 1층에 아무도 없으니까 내려오라고 해야했던 적도 있었다. 지금 캐릭터와 상당히 다른 듯하지만 그렇지도 않다. 아마 영국에서 주택에 살았다면 똑같은 두려움이 반복됐을 것이다. 당시 살던 서울 주택은 담벼락이라도 높았지, 영국 주택은 웬만히 비싼 집이 아니라면 담 조차도 없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내가, 지금 살고 있는 "가장 먼저 대규모 개발이 시작되었고, 또 가장 도시화된 구이기도 하다(나무위키)"는 이 동네에서 동물의 왕국을 경험하고 있다는 사실. 바로 이 사실을 기록하고 싶어졌다. 우리 동네에는 탄천이 줄기차게 흐르고 있는데 여기서 일어나는 일들이 도시여자가 보기에 참 흥미롭다는 걸 깨달은 참이다. 친한 온라인 이웃님 중에 여의도 샛강을 산책하면서 정기적으로 기록을 하고 계신 분이 있다. 본업은 번역가이신데 나도 해볼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용기를 얻어 기록을 시작하려고 한다.

다만 내가 파브르도 아니고 탄천을 관리하는 구청직원도 아니고 이웃님처럼 세계사에 빠삭한 번역가도 아니므로 생태기록도, 시설기록도, 세계사에 등장하는 사건을 탄천의 배경과 접목시킨 멋진 글귀도 선사하지는 못한다. 그저 질문이 많은 8세 여자 아이를 키우는 감성적인 수필가로서, 방송작가로서 쓸 수 있는 것을 기록해보려고 한다.  



먼저 어제 있었던 일로 시작해봐야겠다.

아이 학교 앞이 요즘 공사 중이라 길이 막혀 있다. 그 길로 등하교를 하는 어린이들이 꽤 되는데 우리 아이는 그 길로 다니지 않지만 같은 반 친한 친구에게는 그 길이 꼭 필요한 길이다. 그 친구는 전학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동네 사잇길을 잘 모르고, 우리 아이는 오는 6월이면 이 동네살이 3년이 되어가기 때문에 자신감있게 그 친구를 집에 데려다주고 오겠다고 전화를 한 터.  

나도 아이 전화를 받았을 때는 담력이 센 엄마인 척을 하면서 어 그래그래 탄천 건널 때 조심하고 길 가는 모르는 사람들 조심하고 누가 집중력 좋아진다고 마실 거 줘도 마시지 말고 어쩌고 저쩌고 했다. 하지만 잔소리를 하고나서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서 결국 집을 나섰다. 아이들 동선이 뻔해서 걸음을 재촉하자 저 멀리 손을 잡고 걷고 있는 아이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몇십미터 뒤에서 꺄르르 꺄르르 하는 아이들을 따라 탄천을 걷고 있는데 갑자기 아이들이 멈춘다. 땅을 바라보며 어떡해 어떡해 종알댄다. 그제야 아이들에게 가까이 가보니 작은 새가 가만히 서서 졸고 있었다.

특별히 관심이 필요한 어린 새끼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다 큰 어른도 아닌 모습으로 날개는 있는데 날갯짓은 하지 못했다. 가만히 서 있다가도 오리도 아닌 것이 뒤뚱거리며 두세걸음 걷다가 멈추어서 눈을 감고 잠을 잤다. 한참 뒤에 다시 눈을 뜨고는 뒤뚱뒤뚱 몇 발자국 걷다가 다시 병 걸린 닭처럼 잠을 자는 것이었다. 도시여자인 나는, 그때는 알 수 없었지만 이 글을 쓰는 지금은 안다. 그 새는 아마 이소 중이었을 것이다.

 

이소7(離巢)「명사」 『동물』 새의 새끼가 자라 둥지에서 떠나는 일.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서 이소의 7번째 표제어. 떠날 이, 새집 소. 새 새끼가 자라서 둥지를 떠나는 일을 뜻하는 한자어이다. 너무 어렵다. 국어원 누리집에서 좀 더 쉬운 말을 찾아봤는데 이런 게 있었다.


조류 등의 어린새가 둥지를 떠나 독립하는 것을 이르는 단어

이소하다 - 둥지를 떠나다

환경부, 중앙행정기관 전문용어 개선안 검토회의 결과(2014. 6.)


그러니까 아이들이 작은 발을 동동거리며 쳐다보면 그 작은 새는 둥지에서 실수로 떨어졌거나 또는 어미새가 약하다고 판단해 일부러 밀어버렸거나 또는 이미 스스로 둥지를 떠나(이소) 자립하고 있는 중이었던 것이다. 일부 동네 어르신들이 휴대폰으로 어딘가에 전화를 걸어 이 새를 구출하려는 모습까지 보고 우리는 자리를 떠났다.



나는 영국에서 몇 년 전에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다. 어제 본 새보다 훨씬 작은 새끼 새가, 누가 보아도 너무 작아서 둥지에서 실수로 떨어진 것 같은 아기새가 길에 떨어져 있었다. 내가 살던 동네는 관광지라서 유럽인이 많았는데 그 사람들이 서툰 영어로 이걸 어떡하냐며 동네사람인 내게 물었던 적이 있다. 공교롭게도 아기새가 떨어졌을 것으로 생각되는 나무가 있는 곳은 Restoration House라고 불리던 관광지로 매일 여는 곳이 아니었다. 설사 열었다고 하더라도 개인 집이 아니기 때문에 무턱대로 현관을 두드려서 너희 정원에 있는 나무 둥지에 새만 잠깐 올려놓고 다시 나오겠다고 할 수도 없었다.

이때 조언을 받아 안 사실인데 이런 경우엔 그냥 새끼를 놔두어야 한다. 어미새가 다시 새를 데리러 올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그렇다고 들었다. 그런데 인간들이 옹기종기 모여서 걱정을 한들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이다.


그때 생각이 나서 나는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다. 어제 내가 본 새끼는 몇 년 전에 본 아기새보다 훨씬 더 컸다. 청소년 쯤 됐을까. 비둘기처럼 보이긴 하는데 새 종류를 잘 모르니 정확하지는 않다. 뭔가 오색찬란한 날개를 갖고 오드아이라도 뽐내면서 나는 멸종위기종이야, 라는 아우라를 풍겼다면 나도 적극적으로 구출에 나섰을 지도 모를 일이지만 다른 분들이 이미 나서고 있었고 영국에서는 죽여도 무방한 페스트로 분류되는 비둘기인 것 같아서 그냥 자리를 떠났다. (아무리 그렇다고 영국에서도 개인이 죽이려는 행동은 삼가길. 기본적으로 새를 죽이거나 둥지를 맘대로 제거하는 일들은 불법이고 pest control 전문가들이 따로 있다)


다만 아이에게는 여러가지 설명을 해줘야 했다. 너가 훨씬 더 어릴 때, 너는 기억나지 않겠지만 집 앞에 아기새가 떨어진 적이 있었어..라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유럽사람들이 그 새를 구출하려고 했지만 그냥 놔두는 게 좋다고 전문가들에게 조언을 받아서 그냥 놔둔 적이 있고 방금 같은 경우엔 어디서 담당하는지 모르겠지만 전화를 해두었으니 금방 해결이 될 거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말해주었다. 가만히 듣던 아이가 대답했다.


- 저 새를 그냥 놔두면 딱지가 와서 잡아먹을 거야...!


딱지는 탄천에 사는 길고양이다. 딱지 이야기는 다음에 또 풀어보자.




*배경사진이 어제 찍은 그 새끼 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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