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는 아시아에서 시작된 코로나가 유럽에 퍼지기 시작하던 2020년이었다. 어차피 몇 시간 뒤에 녹아버릴 흰 눈이 조금만 내려도 병원, 기차, 학교 등 나라가 마비되는 영국에서는 바이러스 소식이 전쟁 소식과 같았다. 경찰인 남편은 전쟁 같은 일이 터져도 무조건 출근해야 하는 key worker였지만 바이러스에 감염된 사람의 신고를 받고 출동해도 당시엔 해줄 수 있는 일이 없었기에 과감히 휴직을 선택하게 되었다. 물론 바이러스 하나만 갖고 선택한 일은 아니었고 친한 동료이자 친구의 자살, 브렉시트 이후 줄어드는 영국살이의 이점 등등을 고려한 사항이었다고 한다.
아이가 4살이었다. 너무 어려서 해외이사를 준비하는데 정신이 없었기에 나와 아이만 먼저 한국으로 보내졌다. 그렇게 나는 집도 없이 엄마 홀로 계신 친정에 비비며 십년 만에 돌아온 한국에 적응을 시작했고 몇 주 뒤 집 정리를 끝낸 남편이 한국에 들어왔다. 영국 변이 바이러스니 뭐니 하는 시끄러운 뉴스들 덕에 한국어를 하지 못하는 아이와 외출이라도 하면 동네 할머니들이 실눈을 뜨고 질문을 했었다. 어느 나라에서 왔냐고. 이 질문은 지금이라면 영어로 대화하는 모녀에 대한 단순한 호기심이었겠지만 그땐 아니었다. 최근에 비행기를 탔다고 하면 아무리 친한 친구라도 약속하지 않고 병원에도 입장하지 못하던 그런 전쟁같은 시기였다.
나는 세상 박터지게 반대하는 결혼을 했었다. 이 이야기는 브런치에 연재할 게 아니라 중국드라마로 써야할 만큼 길어서 생략하기로 한다. 나는 아이와 친정에서 지내고 남편은 시댁에서 혼자 지내는 시간이 이상하게 점점 길어지고 있었다. 한국에 집을 구해서 같이 살 생각을 하는 나와 달리 남편은 한국에 오자 자기가 태어난 가족과 자기가 만든 가족 사이에서 심한 갈등을 하고 있었다. 영어로 long story short라고 하던가. 짧게 말하면 극심한 갈등 끝에 남편과 연락이 되지 않는 상황까지 갔고 1년 뒤, 남편이 해결 카드를 가지고 나타났다.
시골에 집이 있으니 거기서 함께 살자.
그곳은 돌아가신 아버님이 사놓은 땅에 나중에 어머님이 지어놓은 주택이었다. 서울에서 사시던 어머님이 코로나가 심해지자 사람이 없는 동네에 있는 한적한 이 집에서 지내셨는데, 코로나 막바지에 암에 걸리고 말았다. 서울의 큰병원으로 어머님이 옮겨졌고 수술 후 지금은 완치하셨지만 혹시 몰라서 계속 서울에서 지내는 것이 좋다고 판단했다. 이 시골주택에서 가장 가까운 병원은 차로 전속력으로 달려도 한 시간 거리이기 때문이었다.
이것이 우리가 이 시골집에서 살게 된 경위랄까. 살게 된 원인이랄까. 구실이랄까, 변명이랄까. 평소 같으면 병원도 먼 시골에서 아이를 어떻게 키우냐고 말했을 나지만 나도 친정엄마와 오랜만에 같이 살면서 지칠 대로 지쳐있었고 아이도 아빠와 한 지붕에서 살던 삶을 매일 울며 그리워하고 있던 차였다. 영국에 너무 오래 살면서 계속된 저녁 근무에 햇빛을 전혀 보지 못해 계절성우울증에(SAD) 시달리던 남편도 또 언제 사라질 지도 모를 일. 나는 서둘러 대답했다.
그래. 시골에서 다 같이 살자.
이 대답을 한 게 지난 봄이었다. 그 사이에 나는 결혼식에도 오지 않은 시어머니와 마주 앉아 대화도 할 수 있게 되었고 주말마다 시골집에 가서 본격적으로 살 준비를 하느라 5도2촌 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때의 이야기가 일부 브런치에 남아 있다. 아이는 한국에서 처음 시작한 초등학교이니 학년은 마치고 가자는데 동의했고 12월 겨울. 드디어 마지막 수업을 마치고 다음 학년에 배울 새 교과서를 받아서 새 동네로 이사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