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저런 이유로 이사를 자주 다니는 집들은 흔하다. 가족의 잦은 발령이라든가 전월세의 계약만료라든가. 하지만 2015년의 나는 그럴 일이 없었다. 결혼 4년 차였던 남편은 일부러 그 지역에 지원하지 않는 이상 발령 받거나 하는 직업이 아니었고 또 영국은행 모기지를 통해 집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이제 한군데 정착해서 막 돌이 지난 아이를 잘 키우기만 하면 되는 거였다.
한국에서 아이의 어린 시절을 보내지 않아 정확한 비교를 할 순 없겠지만 영국은 부모 중 한 명이 일을 하고 다른 하나가 일을 하지 않는 경우에 일주일에 15시간을 나라에서 맡아줬던 기억이 있다. 맞벌이의 경우엔 30시간이었다. (2015년 기준) 나는 아이 4살까지는 친정도 없는 먼 나라에서 온전히 내가 아이를 키우다가 어느 날, 드디어 첫번째 기관에 아이를 보내기 시작했다. 한국에서 친구들이 독박육아라는 낱말을 쓸 때마다 괜스레 화가 나던 시절이었다. 너희는 아빠가 내주는 영유 학비에 엄마가 해주는 반찬도 갖다 먹으면서 무슨 독박육아래. 이렇게까지 피해의식에 쩔어, 피곤에 지쳐 지내다가 맞이한 달콤한 자유시간이라니.
1살 때부터 친하게 지내던 동네 친구가 이미 다니고 있던 곳이라 아이는 수월하게 적응을 했다. 또 영국에서 태어나서 자란 아이인지라 언어 문제도 없었다. 친구랑 뛰다가 앞니가 부러졌던 것 빼고는 즐거운 기억으로 아이에게 남아있으리라 믿는다. 첫날 아이가 적응을 못한다고 전화라도 올까봐 기관 옆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몇 시간을 기다렸던 기억은 지금은 우습다. (훗날 나는 이 카페에서 한국어 과외를 시작하여 loyal customer*가 된다) 하지만 이것도 잠시. 다니고 있던 Pre School에서 다른 학교의 Nursery로 아이를 옮기기로 결정하게 된다. 아빠가 다니던 학교의 어린이집으로 옮기는 거라고 말하면 이해가 쉬울까. 아마도 내 브런치에서 가장 높은 조회수를 기록했던 던 걸로 기억하는 '칠공주' 관련한 글에 등장하는 친한 아이들 그 누구도 이 학교를 보내지 않았다. 학비가 그 동네에서 가장 비싼 사립학교였고 한국사적으로 따지면 신라시대 때부터 있었던 유서 깊은 학교이긴 해도 굳이 15시간 무료 돌봄 바우처를 버리고 유료로 이 학교를 보낼 이유가 없기 때문이었을 거다. 하지만 내 반대를 뒤로 하고 그 어려운 걸 아이 아빠가 해내고야 만다.
그렇게 아이는 넥타이를 매는 교복을 입는 학교로 옮겨가 두 번째 적응을 시작했고 왜 원래 친구들이 이 학교에 없는지 점점 이해하며 Nursery, Pre-Prep과 Year 1을 거쳤다. 그리고 2020년, 이 연재 브런치의 1화처럼 갑자기 한국에 가게 된다.
나는 한국어를 하지 못하는 아이를 영어유치원에 보낼 이유가 없었다. 국공립기관에는 자리가 없었고 친정 근처의 자리가 있다는 사립 유치원에 아이를 넣어야 했다. 아이는 거기서 세 번째 적응을 시작했다. 왜 한국 아이들의 인종이 모두 똑같은지 이해할 수 없던 아이는 당시에 나이가 들면 다 동양인 피부를 갖게 되는 거냐고 묻기도 했다. 아이는 적응을 잘했지만 코로나는 좀처럼 끝날 생각을 하지 않았고 여러가지 다른 상황을 안게 된 나는 유치원을 졸업시키지 않기로 하고 아이를 기관에서 뺐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한국어를 유창하게 하는 초등학생이 된 아이가 1년 만에 다시 Year 1, 1학년이 되어 네 번째 적응을 시작해 3학년까지 마쳤고 4학년이 시작하기 전에 인구소멸위험지역인 시골로 이사를 와 다섯 번째 적응을 시작한 것이다.
시골 이사와 전원 생활을 선택할 때 아이가 적응을 못하면 어떡하지와 같은 걱정은 그리 크지 않았다. 언제나 이 아이는 적응을 잘했고 잘하고 잘할 것이라는 믿음이 강력하게 박혀 있기 때문이다. 지난 9년 동안 아이가 보여주지 않았는가. '엄마, 나는 잘해요. 걱정하지 마세요'라고.
어른들 때문에 다섯 번째 환경을 바꾼 아이의 아침은 어떨까. 산새소리와 우리가 키우는 닭 울음소리를 들으며 깨고, 학교 가는 길에 닭장 속 달걀을 꺼내 냉장고에 넣어놓는다. 시간이 있으면 따뜻한 달걀을 바로 구워 먹기도 하지만 늦잠을 잤을 땐 학교에 다녀와서 직접 구워 먹는다. 봄이 되니 여기저기 푸릇한 풀들이 나오기 시작해 괜스레 뜯어 닭에게 주며 엄마, 닭이 이 풀은 먹고 저 풀은 안 먹어, 라고 말한다. 학교에 다녀오면 시고르자브종 사랑이를 풀어놓고 마당에서 산책을 시키고 삽으로 개똥도 자기가 치운다. 도시에 살 때도 그렇게 강아지 타령을 했는데 똥 쯤이야 본인이 관리해야 한다는 걸 아는 듯하다.
냉이, 돌나물, 쑥, 민들레나물, 꽃다지 등을 아는 9살이라는 게 너무 신기할 따름이다. 이 아이가 Nursery 선생님이셨던 50대 Mrs Heather의 발음을 하던 아이가 맞나 싶다. 많은 어른들이 아이의 영국 발음이 흐려져 가는 것을 아까워 하고 나도 그렇지만 대신 나는 마미! 대신 엄마!를 되찾은 기쁨이 있다. 지금은 빅토리아 여왕이 방귀 뀐 얘기 보다 명성황후가 어떻게 살해당했는가에 대한 이야기를 더 흥미롭게 듣는 아이이다. (명성황후 생가에 다녀오길 잘했어!) 어디서나 적응을 잘해줘서 참 고맙고 사랑해 아가. 너는 정말 Super야.
*loyal customer 단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