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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eon Jun 14. 2020

아이를 잃어버린다는 두려움

두려움은 준비로 이어지고 

두 아이를 키우고 있는 친구와 이탈리아에 놀러간 적이 있다. 2012년이었을까, 2013년이었을까? 영국에 사는 우리 부부는 영국에서 차를 운전하여 이탈리아로 갔고 독일에 살고 있는 친구도 자기 차로 이탈리아로 향했다. 가르다호(Lake Garda) 근처에 같은 숙소를 예약해서 여름을 즐기고 있었다. 


일은 베로나에서 터졌다. 우리 부부는 미술관 구경을 하기로 했고 친구는 두 아이와 함께 다른 곳을 구경하기로 하여 여행 중 처음으로 떨어져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그런데 우리가 미술관에 입장하자마자 친구에게 전화가 왔다. 


아이 하나를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급히 미술관에서 나와 친구를 다시 만났고 그때부터 우리는 눈물을 흘리며 잃어버린 아이를 찾기 시작했다. 베로나 경찰에 신고를 했고 영화처럼 오토바이를 타는 이탈리아 경찰들이 왔다. 아이가 어떻게 생겼느냐는 말에 마지막으로 같이 찍은 사진을 보여주며 인상착의를 설명했다. 친구는 아이를 마지막으로 본 장소에서 발을 떼지 못하였다. 아이가 그곳으로 다시 돌아올 때를 대비하여 한 곳에 서 있었고 우리 부부와 경찰들이 베로나 곳곳을 쑤시고 다니며 아이를 찾기 위해 뛰었다. 


몇 시간이 흘렀는지 모르겠다. 한 여름이었고 혼자 있을 열 살 아이의 건강이 걱정되었다. 혼자 있다고 해도 걱정이고 혹시 누구와 같이 있다고 해도 걱정이었다. 그 같이 있을 지도 모르는 사람이 나쁜 사람인지 뭔지 알 길이 없으니까. 


그러다가 문득 생각이 들었다. 혹시 아이가 주차장에 가 있는 건 아닐까. 베로나 중심부의 주차장은 외곽보다 비싸서 우리는 조금 떨어진 곳에 주차를 하고 한참을 걸어 시내로 들어왔었다. 혹시나 아이가 그 길을 기억하고 되돌아가서 엄마가 차로 올 때를 기다리는 건 아닐까. 경찰에게 우리가 차로 이탈리아에 들어온 관광객임을 설명하고 주차장이 있는 곳을 말해주었다. 경찰은 주차장으로 향했고 곧바로 연락이 왔다. 아이를 찾았다고. 


그 조그만 게 처음 온 도시에서 한번 걸었던 길을 기억하고 돌아간 것도 대단하고 울지 않고 침착하게 기다린 것도 용하고 어쨌든 해피엔딩이었다. 

그리고 몇 년 뒤 나에게도 아이가 생긴다. 그때 기억이 자주 떠오르는 덕분에 아이가 숫자를 말하기 시작한 3살부터 나와 남편의 번호를 기계적으로 외우게 했다. 한국의 번호가 000-0000-0000의 형식이라면 영국의 번호는 00000-000000이다. 끊어읽는 곳은 달라도 길이는 같다. 내가 유난을 떤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거 외워봤자 아이가 당황하면 입도 벙긋 못한다'며 고개를 저었지만 그럴 때를 대비해 시도때도 없이 아이에게 번호를 물어봤다. 우는 아이에게도 갑자기 번호를 물었고 자다 깨도 물었고 정말 왜?? 라는 이상한 시점과 순간에 엄마 번호와 아빠 번호를 열심히 물어봤다. 아이 아빠도 어른의 번호가 적힌 미아방지팔찌를 주문해 외출할 때마다 아이에게 채웠다. 


우리를 찾으려면 혼자 헤매지 말고 어른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는 것도 가르쳤고 아이폰을 여는 방법, 즐겨찾기에 저장된 아빠에게 전화하는 방법, 엄마 아빠의 번호가 기억나지 않을 때 111을 눌러서 아빠를 찾는 방법 등을 꾸준히 가르쳤다. 


한두번 동네에서 10분 동안 아이를 잃어버린 적이 있다. 베로나에서 친구가 그랬던 것처럼 잠시 고개를 돌려보면 아이가 없었다. 워낙 동양인이 없는 동네인지라 저 멀리에서 사람들이 '엄마 저기있네~'라고 길 잃은 동양인 아이와 두리번거리는 동양인 엄마를 매칭하는 게 웃펐다. 키즈카페에서도 그랬다. (영국에선 soft play라고 한다) 워낙 큰 곳이었는데 아무리 찾아도 아이가 없어서 혹시 문 열고 밖에라도 나갔나 싶을 때 금발의 작은 소녀가 말을 걸었다. 혹시 검은 머리 검은 눈동자 아이를 찾냐며. 그렇다고 하니 그 아이는 저쪽에 있다고 말해주었다. 아마 내가 당황하여 온 소프트플레이를 뒤지고 다니니 그렇게 매칭을 한 거 같다. 이건 인종차별이 아니고 인종특별이다. 

 

이제 아이는 다섯 살이고 한국 나이로는 일곱 살이라고 한다. 내 폰을 열어서 아빠와 whatsapp 메시지도 자유자재로 하고 사진을 찍어서 보내기도 하고 화면 갈무리까지 가능하다. (내가 일곱 살 땐 뭐했지?) 그런데 최근에 우리 가족은 한국 생활을 하기로 결정했다. 지금은 자가격리 중이라 외출할 수 없어서 한국 휴대폰 번호가 없지만 해제되면 폰부터 개통할 생각이다. 자가격리 중이라 나갈 일이 없는데도 나는 그동안 아이에게 할머니 번호를 외우게 했다. 010-0000-0000, 010-0000-0000 비록 한국어가 유창하지 않아서 영어로 외우고 있는 상태이지만 한국 생활이 길어지면 공일공...으로도 외우게 되겠지. 자가격리가 끝나면 경찰서에 가서 아이실종예방 지문등록이라는 것도 할 거다. 한국에서는 잠시 눈에서 안 보여도 네 아이가 저기 있다고 말해줄 금발 소녀는 없을 거기에, 더욱 더 긴장이 된다. 


MBC 아카데미에서 구성작가 과정을 들을 때 담임 선생님이 기억난다. 그분은 취미로 사진을 찍었는데 전국의 보육원(옛날엔 고아원)을 돌며 아이들의 현재 사진을 찍는 일을 했다. (제 기억이 잘못됐다면 누가 얘기해주세요 워낙 오래된 일이라) 나를 바금니라고 부르던 노 선생님(성 씨도 가물가물..) 요새는 어찌 지내는지 궁금하다. 요즘도 잃어버린 아이들의 사진을 찍으시는지. 사진 덕분에 다시 부모에게 돌아간 아이들도 있는지. 


어른이 아이를 잃어버릴 수도 있는 거다. 어른들이 노인들을 잃어버릴 수도 있는 거다. 그런 일이 일어났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대비하지 않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전화번호를 외우게 하자. 도움을 청하는 법을 가르치자. 그리고 다시 만났을 때 꼬옥 안아주자. 길 잃은 베로나의 소년이 환한 얼굴로 뛰어와서 울고 있던 자기 쌍둥이 형제를 꼬옥 안아주었던 것처럼. 


*개인적으로는 엄마가 아니라 형제를 먼저 안은 것이 신기했다. 친구 말로는 혼날까봐 그러는 거라고 :) 


**실종아동 신고 국번없이 112 

실종아동 상담 국번없이 182

문자상담 #01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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