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카로운 첫 치팅의 추억
어느 스낵 애호가의 치팅 다이어리
"어머나, 운동하시나 봐요? 몸이 너무 좋으세요."
같이 술을 마시던 일행이 화장실을 간 사이에 혼자 앉아 있는데 누가 옆에서 말을 걸었다. 몸이 너무 좋다고요? 제가요? 깜짝 놀라 고개를 돌리니, 아, 내가 아니라 옆 테이블의 대화 소리가 유독 크게 들렸던 것. 나는 고개를 돌리다 유난히 체격이 좋아 보이는 근육질의 남자분을 발견했고, 운동을 하신다는, 몸이 너무 좋다는 그 사람임을 알아챘다. 운동을 꽤나 전문적으로 하는 사람인가 보군. 다시는 말도 안 되는 질문에 섣불리 반응하지 않기로 다짐하며 딴 세상 사정이니 시선을 돌리는데 워낙 테이블 간격이 좁다 보니 어쩔 수 없이 그들의 대화를 조금씩 엿듣게 되었다.
그 사람은 몸이 좋다는 말에 입술이 실룩거리고 다부진 근육만큼 숨기기 어려운 미소가 자꾸만 새어 나오는 탓에 누가 보아도 지금 기분이 아주 좋은 근육남이었다. 그는 있잖아-로 시작하는 말을 열심히 이어 가고 있었고 나는 일장연설을 엿듣고 싶지 않아 더는 신경 쓰지 않으려 핸드폰을 꺼냈다. 그러나 하필 그는 만취한 손님 중 가장 몸이 좋은 사람일 뿐 아니라 딕션이 좋은 사람이기도 하여, 좀처럼 끝나지 않는 자랑스러운 서사와 감격스러운 감정선을 유지한 채 그의 이야기는 계속 질주했고 체지방, 근육량이란 단어가 나올 때마다 나는 가시 방석에 앉은 것처럼 의자를 고쳐 앉았다. 안 되겠다 싶어, 무선 이어폰을 꺼내는 순간 그는 드디어 이야기를 마무리하고 있었다.
"인생에서 필요한 건 그냥 딱 한마디였어. 나보고, 끈질기게 운동해서 기어코 몸 만들어낼 녀석이라고 했던 말."
술 마시다 주워들은 거라지만 나는 이 문장을 쉬이 흘려듣지 못했다. 우연한 한마디에 시작하는 일들, 나도 그런 경험이 있었다. 외모에 관심이 없던 나는 아주 우연히 다이어트를 시작하게 되었다. 수능을 끝낸 한가로운 주말, 머리를 하러 미용실에 가니 원장님이 하는 말.
"수능 봤다며? 대학생 되려면 이제 살 빼야겠네."
원장님은 단골손님에게 꿀팁을 주겠노라며, 자신이 머리카락을 책임졌던 수많은 대학생들을 기억해 내며 일단 대학에 붙으면 이제 다시 원점이니 지금부터는 성적순이 아닌 매력순이라고 재차 강조했다. 일단 지금부터 먹는 걸 조절하고 매일 유산소 운동을 하라는 말에 나는 입을 다물지 못한 채 고개만 열심히 끄덕였다. 그것이 나에게 온 첫 번째 한마디였다.
다이어트를 시작하며 난 새로운 다짐을 적었다. "난 반드시 다이어트를 성공한다." 지금까지 책상에 붙어 있던 종이에는 '수능 X등급, XX대학교 입학'이라고 쓰여 있었다. 독서실에서 졸릴 때마다 수험생 컴퓨터용 사인펜으로 몇 번이나 덧칠하여 완성한 대입 염원의 혈서였다. 나는 한때 인생의 전부라고 생각했던 흑백의 소망을 떼고 새 다짐문을 붙였다. 보라색 형광펜으로 가볍고 발랄한 글씨로 적은 목표가 제법 마음에 들었다. 이제 목표를 달성하고 깃털처럼 가볍게 대학생활을 하는 것만 남았다.
당시 내가 정한 구체적인 목표는 졸업식까지 체중 5킬로그램 감량이었다. 5킬로그램이면 1000밀리리터 콜라를 다섯 병 정도 합친 무게였다. 이만큼의 살덩어리를 없애려면 도대체 얼마나 덜 먹고 더 움직여야 하는지 가늠이 되지 않았기에, 나는 일단 평소 먹던 양의 절반만 먹고 저녁마다 한 시간씩 빠른 걸음으로 걷기로 했다. 계획을 다이어리에 적기까지 모든 게 순조로웠다. 그리고 그날 저녁 식사, 자리에 앉기 전에 앞에 놓인 밥공기를 들고 가 밥솥에 절반을 덜자 할머니가 버럭 화를 냈다.
"반찬이 부실해서 그러냐, 밥을 먹기도 전에 다 덜어내 버리고. 반찬을 먹어 보지도 않고."
"아뇨, 그런 게 아니고요. 저 이제 다이어트해야 해서 그래요. 이해해 주세요."
덜컥 시작한 다이어트는 시작부터 쉽지 않았지만 나는 처음으로 밥상머리 규칙을 어겼다. 할머니가 주신 밥을 절반 이상 덜어내고 체중 감량에 해가 되는 반찬은 모두 거부했다. 콩나물과 김, 김치에 밥 반 공기. 할머니는 그렇게 먹다 뼈만 남은 채 말라죽을 거라며 혀를 찼고 엄마는 굳이 그렇게 못 먹을 반찬으로 치부하며 가려 먹어야 하냐고 꾸짖었다. 나는 인생 처음으로 내 몸을 위해 마음먹은 일을 거스르고 싶지 않았기에, 밥상에서 더 처절하게 가리고 제한했다. 그렇게 일주일이 지나자 순식간에 1킬로그램이 빠졌다. 나는 시도 때도 없이 체중계에 오르락내리락거렸다. 할머니는 나보고 호강에 겨워 굶는 짓을 한다고 손가락질을 하면서 콩나물을 잔뜩 무쳐 놓았고, 아빠는 내가 왔다 갔다 하는 모습을 쳐다보더니 말없이 체중계 건전지를 갈아 끼웠다. 엄마는 갑자기 무슨 바람이 들어서 저러냐고 궁금해하지만 딱히 나의 기행(?)을 적극적으로 방해하지는 않았다. 주말마다 방에 과자를 쌓아 놓고 누워 책을 읽거나 라디오를 듣던 아이가 스무 살, 서른 살에도 그렇게 누워서 배를 두드리고 있을까 봐 은근 걱정을 했는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나의 첫 다이어트는 순조롭게 시작했고 잘 끝나는 줄만 알았다.
한 달 만에 3킬로그램을 감량한 나는 세상에서 다이어트가 가장 쉽고 뿌듯한 목표라고 믿었다. 역시 열심히 해서 되지 않는 건 없다고, 인생은 성적순이 아니라 노력순이라고, 힘주어 말할 수 있었다. 난 어릴 때부터 알아서 할 일을 정하고 끈질기게 승부를 보는 편이었다. 스스로 만든 약속에 엄격했고, 그것은 때때로 성적 따위의 숫자로 변환되어 타인에게도 인정받는 계기가 되었다. 다이어트도 마찬가지였다. 한 달 동안 내가 정한 식사량을 지키고 저녁마다 아파트 단지를 빠르게 걸으며 나름의 다이어트 루틴을 만들었고 가족들은 역시 의지가 강하고 끈기가 있다며 손가락을 들어 엄지 척을 해주었다. 이제 남은 2킬로만 더 빼면 되었다. 간단했다. 아니, 간단할 줄 알았다.
3킬로그램 감량 후 체중계에 올라갈 때마다 나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여전히 적게 먹고 저녁마다 빠르게 걷고 있는데 이상하게도 체중은 줄지 않았다. 다이어트 관련 책을 좀 더 찾아보니, 체중 감량은 계단식으로 이루어지기에 체중을 유지하고 다시 감량할 때까지 시간을 갖고 기다려야 한다고. 나는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내가 정한 기한, 학교 졸업식 전까지 목표 체중까지 감량을 해야만 하는데, 무슨 계단이 그렇게 긴 건지 3킬로그램의 구간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결국 대망의 졸업식. 친구들은 나보고 살이 쏙 빠졌다며, 이게 어찌 된 일이냐고 호들갑을 떨었지만 사실 나는 목표를 달성하지 못해 속상했기에, 얼핏 보면 학교를 떠나는 게 아쉬운 졸업생처럼, 빛나는 졸업장을 품에 안고 울상을 지으며 교문을 나섰다.
졸업을 축하한다며 가족들은 내게 무엇이 먹고 싶냐고 물었지만 나는 섣불리 대답을 하지 못했다. 살을 빼야 한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 주제에 다이어트를 해야 한다고 말하기 민망했고, 그리고 무엇보다, 헛헛한 마음 뒤에 숨어있던 나의 목소리가 작지만 계속 말하고 있는 게 들렸다. 치킨, 탕수육, 햄버거, 피자,... 가족들은 원래 졸업식에는 요리를 먹는 거라며 자연스럽게 짜장면과 탕수육을 주문했고 나는 내 눈앞에 놓인 짜장면을 차마 덜지 못하고 먹기 시작했다. 몰라, 오늘은 입에 다 넣어 버릴 테야. 짜장면 한 그릇을 깔끔하게 해치운 나는 탕수육을 소스에 다이빙시키며 경쾌한 '찍먹'을 시작했고, 정신을 차렸을 때는 탕수육 소스 접시가 바닥 나 있었다. 그 순간 어디선가 학교 종소리가 들려왔다. 영원히 고등학교에 다시 가지 않아도 된다는 졸업의 신호이자, 첫 다이어트가 끝났음을 알리는 종료음이었다.
그날 나는 잠들기 전에 몇 번이나 고민을 하다 체중계에 올랐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체중을 확인했고, 결과는 놀라웠다. 정확히 3킬로그램이 늘어 있었다. 두 달 동안 그렇게 열심히 한 결과가 하루 만에, 아니, 한 끼 만에 정확히 원래대로 돌아오다니, 믿을 수 없었다.
나는 깨달았다. 다이어트는 마음이 와르르 무너질 때까지 계단을 걷는 것이고 가장 무서운 적은 그날에 내가 입에 넣는 것들이라고. 감량의 목표 기한을 놓친 것에 더해, 감량 자체를 실패하고 만 그날 나는 완벽하게 제자리로 돌아왔다. 더 이상 배고프다고 울부짖지 않는 볼록한 배를 두드리며 오래간만에 긴 잠을 잤다. 첫 다이어트의 실패였고 날카로운 첫 치팅의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