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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이란 Sep 20. 2023

참을 수 없는 결심의 가벼움

우리는 꺼지지 않은 불씨다

뉴 밀레니엄 시대를 맞이한, 2000년의 어느 평범한 일요일 아침이었다.


당시 내가 살던 집은 정남향으로 동네 뒷산을 마주하게끔 지은 아파트였다. 집에 들어서면 햇살이 거침없이 쏟아져 들어오는 베란다가 단연 눈에 띄었다. 베란다 창문을 열면 뒷산 아래로 바쁘게 들어서는 아파트 재개발 공사 현장과 폐업 후 새로 개업한 가게들의 간판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새천년을 맞이하여 숨 가쁘게 단장을 하는 소리들이 요란하게 울렸고 언덕을 평지로 만들며 흩날리는 분진들이 베란다 전면창에 자욱하게 묻었다. 세상은 제법 분주하게 돌아가는 중이지만 우리 집안의 풍경은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2000년이 오든 말든 관심 없는 할머니는 베란다에 화분들을 가지런히 줄 세우며 90년대를 함께해 온 화초들을 돌봤다. 세상의 소리가 모이고 식물들이 부지런히 산소를 만들어 내는 이곳은 가족들의 쉼터였다. 특히 주기적으로 방문하는 불청객이 있었는데 바로 아빠였다. 아빠는 땅을 부수는 드릴 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산소의 숲 너머에 서서 구름과자를 피웠다. 나는 아빠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빠는 담배 끊을 수 있어?"


아빠는 군대에서 배운 이후로 한 번도 담배를 끊은 적이 없는 애연가였다. 아빠는 베란다에서 매일 갓 만들어진 산소를 마시며 담배를 피웠다. 십여 분을 서 있다 간 자리에는 타버린 재와 꽁초가 쌓였다. 무언가 골똘히 생각에 잠긴 날은 연기를 깊게 뿜어 내기도 했다. 냄새를 빼려고 손을 저어 보지만 연기는 멀리 날아가기는커녕 구석에 자리 잡아 구름처럼 피어올랐다. 나는 그 연기가 싫었다. 방향도 목적도 없이 퍼져 나가는 공기의 배설물이 싫었다. 활활 타오르는 불꽃도 아닌 몇 초 뒤면 사라지는 담배 불씨도 싫었다. 크게 숨을 모아 후 불어 잿더미를 날려 보내도 볼품없게 덩그러니 남은 담배꽁초가 싫었다. 우두커니 쭈그려 앉아 담배를 피우는 아빠를 닮아서 싫었다.  


나는 아빠에게 묻는 동시에 손으로 뉴스가 나오는 화면을 가리켰다. 사람들은 달력에 새로 등장한 2000이라는 숫자에 열광하고 있었다.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여 묵혀 둔 결심을 하는 게 유행이라고 했다. 마음먹은 내용도 다양했다. 열심히 공부를 하겠다는 다짐. 부자가 되겠다는 다짐. 결혼을 하겠다는 다짐. 그중에서도 이번엔 반드시 지키고 말겠다는 결심 중의 결심은 바로 금연이라고 했다.

사실 수차례 금연을 권유했으나 아빠는 응하지 않았기에 나는 별 기대를 하지 않았다. 나와 동생은 장난 섞인 목소리로 아빠가 금연을 하면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놀리듯 이야기했다. 돌아온 아빠의 대답은 의외였다.

"금연, 한 번 해보지 뭐."


아빠는 그날 이후로 담배를 피우지 않았다. 뿌연 연기가 걷힌 베란다에 쭈그려 앉은 아빠도 꽁초도 사라졌다. 아빠는 베란다에 서서 창 밖을 바라보더니 말없이 밖에 나가곤 했다. 아빠가 몰래 나가서 담배를 피우고 온다고 생각했던 나는 추궁할 기회를 노리며 문 앞에 서 있었다. 몇 분이 지나고 현관문을 열고 들어온 아빠는 손에 커다란 봉지를 들고 있었다. 뻥튀기 과자였다. "베란다 창으로 내다보니 뻥튀기 트럭이 왔더라고." 금연을 하면서 아빠는 주전부리를 사 오는 날이 많았다. 담배를 피우던 입 주변이 허전한 모양이었다. 아빠는 마트 앞에 묶음 과자들이 진열되어 있으면 잊지 않고 챙겨 사 왔고 나와 동생은 기다렸다는 듯이 거실로 나와 과자를 모두 펼쳐 놓고 먹었다. 나는 금연의 장점을 새롭게 더 많이 알게 되었다. 아빠의 폐를 보호하고, 베란다의 화초를 검은 연기로부터 구해내는 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우리에게 일용할 간식을 주었으며 아빠의 새로운 모습을 알게 해 주었다. 아빠는 내가 아는 사람 중 가장 의지가 강한 사람이었다. 새 천년 시대의 수많은 사람들이 포기한, 가장 어려운 약속을 지키는 우리 집의 영웅을 바라보며 나는 결심의 위대한 힘을 믿기 시작했다.  


국어대사전에 따르면 결심의 정의는 '할 일에 대하여 어떻게 하기로 마음을 굳게 정함, 또는 그런 마음'이다. 무작정 단호하게 구는 고집과는 다르다. '할 일'을 위해 굳게 가지는 마음이다. 하지만 모두가 한 번쯤 경험해 보았듯 목표를 정하고 그것을 이어 나가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특히 자존심만 강했던 이십 대의 나는 결심을 이어 나가는 게 늘 어려웠다. 끊임없이 남과 스스로를 비교하며 부족한 것을 찾았고 그 결핍은 결심으로 이어졌다. 방학 동안 근육을 만든 지인의 이야기에 내일부터 새벽 운동을 갈 거라고 결심했다. 유학을 다녀온 적이 없는 선배가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걸 보고 자기 전에 한 시간씩 영어 공부를 할 거라고 결심했다. 나는 내 주변을 둘러보며 누군가의 부러움이 되고 싶었다. 마음을 다잡고 주먹을 불끈 쥘 때의 악력과 입가에 힘이 들어가는 표정을 짓는 나 자신이 좋았다. 헬스장을 등록하고 영자 신문을 구독한 날, 나는 뿌듯한 마음에 영수증을 모아 서랍에 넣었다. 시간이 지나고 다시 열어 보며 스스로를 힘껏 안아줄 마음까지 담아서.


그러나 불끈 쥔 주먹은 일주일을 채우지 못하고 너덜너덜하게 힘이 빠지고 말았다. 결심의 상징은 그저 머리나 쥐어뜯는 못난이 주먹이 되고 말았다. 저녁에 친구들과 술을 마신 날이면 다음 날 새벽에 울리는 알람을 끄고 다시 잠을 자기 일쑤였다. 자기 전에 펼친 영자 신문은 생각보다 쉽게 읽을 수 없었다. 단어를 찾아 겨우 기사를 읽고 나서도 나는 별 다른 성취와 흥미를 얻지 못했다. 왜 새벽부터 일어나야 하는지, 왜 굳이 영어로 신문을 읽어야 하는지, 스스로에게 물었고 대답하지 못했다. 나는 결국 횟수의 절반도 채우지 못하고 만료된 헬스장 회원증과 한 번도 꺼내 읽지 않은 신문들은 상자에 담아 책상 밑 구석에 넣고 말았다. 꺼진 불씨처럼 까맣게 그림자가 드리운 자리에 억지로 구겨 넣은 결심의 잔재들은 마치  베란다에 쭈그러진 채 쌓였던 담배꽁초 같았다. 다 헤아릴 수 없지만, 그 이후에도 선망의 대상이 되고자 저지른 충동적인 결심과 순식간에 찾아오는 후회의 흔적이 숱하게 많았다. 나는 바람에 실어 날려 버리고 싶었다. 갈 곳 잃고 부서져 버린 목표들을. 흑역사를 잔뜩 버무린 나의 이십 대를. 연기처럼 사라지고만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결심의 가벼움을.


포기의 아이콘이 되고 싶지 않아 한동안 새로운 일을 시도하지 않았다. 해볼까-라는 설렘보다 또 그만두었다는 실망이 더 버거웠기 때문이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결혼을 한 뒤로 나는 자발적으로 야식과 술을 끊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단 한 번도 야식과 술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 본 적이 없던 내가 마음을 바꾼 건 아이가 갑자기 꺼낸 말 때문이었다.

"엄마는 술이 그렇게 좋아?"

아이의 질문에 나는 깜짝 놀랐다. 술을 좋아하냐는 질문도 아니고, 술이 '그렇게' 좋냐는 말 안에 담긴, 내가 미처 들여다보지 못했던 감정들이 밀려왔다. 나는 바쁜 일과를 끝내고 집에서 마시는 맥주야 말로 당연히 누려야 할 휴식이자 권리라고 믿었다. 술은 그저 고단한 날을 끝낸 기념으로 지친 몸과 마음을 달래려고 마시는 것뿐인데, 아이 눈에는 '맥주만 좋아하는 엄마'가 보였던 걸까. 나는 술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대답했지만 아이는 그 대답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엄마는 피곤한 날에도 맥주를 찾았고 기쁜 날에도 마셨다고, 아이는 단호하게 말했다.

"좋아하니까 매일 마시는 거겠지. 좋아하면 매일 보고 싶은 것처럼."


매일 하는 행위에 크게 의미를 두지 않았던 나는 아이의 말을 지우지 못하고 계속 떠올렸다. 나는 왜 매일 술을 마시고 있을까. 업무 스트레스가 많아서 어쩔 수 없었다고 변명해 보지만 그것이 반드시 술이어야 했던 이유를 설명할 수 없었다. 술을 좋아하지 않는 남편을 탓할 일도 아니었다. 사실 별 뜻 없이 매번 식탁에 두고 마시던 맥주였다. 나는 왜 딱히 원하지 않는 일들로, 별 의미 없는 일들로 시간을 보냈던 걸까. 무의식적으로 스스로를 파괴하고 있던 습관들을 적어보았다. 아이 말이 맞았다. 나는 감정을 달래기 위해 술을 선택해 왔다. 술을 마시며 간헐적으로 그날의 감정을 상기하거나 기분을 마취했지만 나에게 어떤 해결책도 주지 않았다. 내가 바라던 저녁의 모습이 아니었다. 내가 원하는 모습이 아니었다. 나는 집에서 술을 마시는 습관을 버리기로 결심했다. 시간을 쓰고 좋아하지 않는 일을 결심하며 포기하는 삶을 살아왔다. 그런데 나는 진정 원하는 일을 찾아 결심한 적이 있던가.


그러나, 결심. 나는 그것이 얼마나 경박한 단어인지 알고 있다. 다시는 집에서 맥주를 마시지 않겠다고 다짐한 지 며칠이 지났을까. 마트에서 장을 볼 때마다 여전히 맥주 코너에 눈길이 갔다. 무심히 지나치려고 노력하지만 세일 특가 광고와 새로 입고된 신상 맥주들의 절묘한 조합은 왠지 오늘 저녁에 먹기로 한 치킨의 풍미를 더할 것 같은 상상을 불렀다. 나는 꾹 참고 돌아서며 굳건한 자제력을 칭찬했다. 물론 치킨을 마주할 때마다 이제 영원히 집에서 맥주를 마실 수 없다는 생각에 묘한 억울함이 끓어올랐지만 맥주 대신 사다 놓은 탄산수를 들이켜며 막힌 속을 달랬다.  


그러던 주말 저녁, 친정 집에 가족이 모였다. 오랜만에 배달 음식을 먹자며 주문한 것은 치킨이었다. 때마침 동생이 이럴 줄 알고 시원하게 놔두었다며 냉장고에서 맥주를 꺼내 오더니 내게 한 캔을 건넸다. 모두가 자기 앞에 놓인 치킨을 먹기 시작했지만 나는 맥주 캔을 쳐다보며 어찌할지 내적 갈등에 빠졌다. "사실 이제 집에서는 술을 안 마시기로 했는데." 안타깝게도 치킨을 발골하느라 바쁜 식구들에게 나의 말은 닿지 않았다. 오히려 그 말은 내 귀에만 꽂혔고, 순간 꾹꾹 눌러 놓았던 억울함은 결심의 틈을 타, 수없이 흔든 맥주 캔처럼 걷잡을 수 없이 솟아오르고 말았다. "그래, 집에서 편하게 마시는 맥주가 최고지!" 균열된 결심은 희열의 거품이 되었다.  

맥주를 한 모금 넘기자 오랜만에 들어온 알코올 향이 코 안에 가득 퍼졌다. 아이고, 이번에도 난 망했구나. 나는 집에서 술을 마시지 않기로 했던 나의 결심을 털어놓았다. 놀림거리를 찾은 동생은 그러게 평소에 적당히 좀 마시지 그랬냐고 핀잔을 주었다. 예상했던 반응이었지만 한심한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러면서도 찝찝한 표정으로 한 손에 치킨, 다른 한 손에 맥주 캔을 놓지 못하는 나를 보며 잠자코 있던 아빠는 맥주 한 캔을 내 옆에 끌어 놓았다. "원래 결심은 몇 번을 무너지면서 다시 또 세우는 거야. 기왕 무너진 거 즐겁게 해."  

나는 매번 싱겁게 끝나버리는 보잘것없는 결심의 유효기한이 아쉬웠다. 아빠는 그런 나를 보며 웃었다.

"원래 마음먹는다는 게 그래. 엄청난 일을 한다고 생각하면 엄두가 나지 않지. 그런데 그냥 가볍게 해 보자고 하면 또 하루 이틀 가볍게 지나가거든."


돌이켜보면 아빠는 금연을 결심한 뒤로 담배를 피우던 시간을 소박한 일상으로 채워갔다. 특히 아빠가 사 온 주전부리들은 굳은 다짐을 응원하는 아빠만의 소울푸드였다. 결심은 잿더미 속에 숨은 불씨에서 시작했지만 마치 강냉이를 뻥-튀겨져 고소한 팝콘이 되듯, 꺼지지 않는 불꽃이 되어 우리 집 거실을 환하게 비추고 있다.

아는 것과의 이별은 쉽지 않다. 망각은 의지의 영역이 아니기에 새로운 경험이 자리 잡을 때까지 우리는 잊었다고 믿고, 모른다고 믿어야 한다. 해묵은 습관은 과거의 내가 선택한 시간들을 품고 있다. 그것을 부정하려면 내가 가진 아쉬움과 당시의 선택에 대한 반성, 그때의 나를 용서해야 비로소 결심을 이어 나갈 힘을 얻는다.


완벽한 사람이 없듯이 완벽한 결심도 없을 것이다. 얼마나 더 여러 번 무너질지 알 수 없다. 어떤 날에 도저히 답답한 마음을 참을 수 없어 다시 맥주를 마시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럴 때마다 목마름이 급해 나를 돌보지 않은 나를 마주하며 말없이 껴안아 주고 싶다. 아빠가 수십 번의 아침을 담배로 태웠듯 나도 나에게 손을 내밀어 다시 해보자고 말할 수 있길 바란다. 나를 밝힐 불씨는 여전히 남아있다. 참을 수 없는 가벼운 결심일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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