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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이란 Sep 24. 2023

슬기로운 금빵생활 - 상

빵을 사랑하지 않는 자, 모두 유죄

출근하는 사람들로 붐비던 늦은 봄날, 사무실로 가느라 지하철 출구 밖으로 걸어 나가는 데 뭔가 쓱 앞에 나타났다. 다름 아닌, 헬스장 광고 전단지. 이번에도 너로구나. 날이 뽀송뽀송하다 싶으면 어김없이 등장하는 빳빳한 종이가 은근히 반가웠다. ‘미안하지만 난 관심 없어요.’ 나는 코웃음을 치며 종이를 접어 버리려는데 순간 헤드라인에 적힌 굵은 글씨가 유독 눈에 띄었다.


'개업맞이 특가할인. 특히 예비신부 환영.'


가격을 사정없이 패대기친 것까진 익숙해졌는데 예비 신부를 겨냥했다고? 하필 11월 예식을 막 예약하던 차, 읽지 않고 넘어가기엔 너무 나를 겨냥한 단어와 문장들. 상업화된 다이어트 시장을 비판하며 살은 절대 돈으로 빼는 거 아니라고, 두세 시간을 걷고 밤새 노래를 부르며 그날 먹은 탄수화물을 활활 태우던 나는 결혼을 앞두고 유독 자본 투입에 관대해졌는데, 2시간 예식에 드는 비용이 여차하면 수백만 원이다 보니 몇십만 원이라며 옆에 특별 할인가-라고 적은 PT 비용은 그저 깜찍하게 느껴졌다. 게다가 ‘예비 신부’라는 키워드를 고른 편집자의 어휘에서 느껴지는 공감능력이, 결혼을 앞둔 복잡한 심정과 상황을 이해할 것 만 같은 헤드라인이었고, 환영한다는 말 마저 참 다정해서, 마침 얼마 전 신용카드 한도를 힘껏 끌어올린 나는 거침없이 헬스장을 찾아 걸어 들어가고 말았다.


화려한 조명이 켜진 공간에 들어서니 새것처럼 번쩍거리는 러닝머신에서 빠르게 걷고 있는 민소매 남성과 이어폰을 끼고 고속도로를 달릴 듯 사이클 페달을 돌리는 여성이 보였다. 그들 너머로 보이는 중년 남성은 스포츠 브랜드 명이 크게 적힌 손목 밴드를 차고 아령을 들고 있었다. 철컥거리는 쇠질 소리가 나서 쳐다보니 한 남성이 바벨을 들어 정리하고는 내 쪽으로 다가왔다. 키가 크고 체격이 어마어마한 그는 자신을 트레이너 D라고 소개했다. 어떻게 오셨냐고, 직장인이시냐, 그는 원석을 다듬는 디자이너처럼 나를 요리조리 뜯어보며 물었다.

"결혼식이 언제라고 하셨죠?"

"이번 가을이요."

그는 달력을 넘기며 실질적으로 운동에 집중할 수 있는 기간은 석 달 정도로 보인다고, 어떤 결과도 만들어낼 수 있는 시간이라고 하면서 다만 회원님이 믿고 따라와 주셔야 할 게 많다고 단서를 붙였다. 뭐가 가능하다는 건지, 뭘 믿고 따라야 하는지, 나는 도통 가늠이 되지 않았다. 게다가 테크노풍의 배경음악 소리가 너무 커서 눈을 찡그리며 네?, 네? 하고 몇 번을 되물었지만 D는 그런 상황을 신경 쓰지 않으며 차분히 말을 이어 나갔다. 그는 아직 등록도 안 한 내게 문장마다 '회원님께만 특별히'로 시작하며 나에게 딱 맞는 프로그램이 있다고 특정 숫자나 단어를 자주 언급했다. 특히 '딱 석 달'은 마치 신입 예비신부의 수습기간처럼 반드시 거쳐야 하는, 그리고 버텨 내야 할 기간처럼 큰 목소리로 강조했다.

"이제 석 달 후면 결혼식장의 주인공이 되실 거고, 인생에서 가장 마른 컷을 찍게 되실 거예요."  


회원 가입 서류를 작성하며 나는 온라인 카페에 떠돌아다니는 자극적인 제목들을 떠올렸다. 나는 잠시 주춤거렸다. 기혼 월드에서 '나태지옥'이라는 기구에 탑승하려고 줄을 선 아이처럼 탈까 말까 고민을 하는데 D가 신체검사를 해야 하니 따라오라고 했다. 바이킹에 타려고 키를 재듯 떨리는 마음으로 체중계에 올라섰다. 약 1분 동안 인바디를 측정하고 트레이너와 다시 상담 테이블에 마주 앉았다. 체중은 정상.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D는 결과지를 한 줄씩 읽어 나갔다. 체지방률이 높고 근육이 너무 적다고, 빨간펜으로 숫자 주변을 한 번 휘감고 밑줄을 두 개 그었고 진단서를 쓰는 의사처럼 휘갈기며 빠르게 처방을 내렸다.

"12주 상체 집중 코스로 식이 조절 필수입니다."


이끌리듯 결제를 마치고 나온 나는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PT는 주 2회로 화요일과 목요일 점심시간에 하기로 했고, 이 보다 완벽한 계획은 없다고 생각했다. 첫 PT날, 나는 점심을 거른 채 유산소 운동을 20분 간 하고 D의 우렁찬 구령에 맞춰 스쿼트를 했다. 투명 의자를 앉는 자세라고 간단히 열 번씩 3세트를 시키는데 그 폼과 강도가 중학교 품행 검사 때 받은 단체 체벌과 유사했다. 1시까지 사무실로 복귀해야 했기에 나는 기진맥진해서 늘어질 틈도 없이 아주 간단한 샤워만 하고 헬스장을 나서는데 다리가 후들거렸다. 엉금엉금 퇴장하는 내게 D는 지금 이 순간부터 먹는 모든 음식을 적어서 문자로 보내라며 특히 조심해야 할 음식들을 일러주었다.

"특히 빵 드시지 마세요. 알았죠?"

"왜 빵은 먹으면 안 되나요?"

"빵은 그냥 안됩니다. 살 빼시려면 빵 절대 드시면 안 됩니다."


D는 글루텐이 어쩌고 하면서 빵이 살찌는 가장 강력한 원인이라고 몇 번이나 강조했다. 빵 말고도 먹을 게 많으니 그냥 시키는 대로 하라는 그의 말에 나는 뭔가 할 말이 많았지만 입도 뻥긋하지 못했다. 솔직히 내가 빵을 많이 먹긴 하니까.

빵빵 거리는 D의 잔소리에 실컷 얻어맞고 나오는데, 문득 화가 났다. 아니, 빵이 그렇게 몸에 안 좋은 음식이라면 애초에 팔지 못하게 했어야지. 드라마에서 빵 먹는 장면은 왜 그렇게 실감 나게 찍어서 내보내는 거냐고. 우리 동네만 해도 최근에 생긴 동네 카페가 몇 개인 데다 빵 굽는 솜씨들은 얼마나 좋은 지. 빵 공화국에 살면서 빵 먹은 게 잘못이라 하니 억울했다. 인도에서 카레 먹지 말라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쳇, 그래 좋아. 빵 안 먹고 말지. 감히 나를 자제력이 없는 한심한 회원 취급하다니, 나를 뭘로 보고. '

나는 단호한 D에게 단단히 삐졌고 반드시 살을 빼서 그를 놀라게 해 주겠노라 마음먹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밀당의 고수였던 D에게) 나는 정식 대결을 받아들이며 복수하기로 다짐했다. 나는 한동안 군말 없이 내가 먹은 것들을 보고했다. PT도 빠짐없이 가서 낑낑거리며 시키는 운동을 모두 했다. 등에 근육이 붙고 있는 건지 알 수 없었지만 가끔 D로부터 칭찬을 받으면 나는 뿌듯한 마음에 어깨가 으쓱했다. 점심시간을 고스란히 헬스장에서 보내고 온 나는 사무실로 돌아오자마자 탕비실로 가서 냉장고 문부터 열었다. 우유와 주스가 있었지만 꾹 참고 찬 물만 마시고 돌아섰다. 굶주린 배를 움켜쥐고 일을 하다 보면 오후 서 너 시쯤 사내 간식을 챙기는 인심 좋은 동료들이 나를 불쌍히 여기며 견과류나 바나나 따위를 따로 챙겨주었다. 


나는 그것이 빵이 아니어서 감사했고, 슬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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