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헤이란 Sep 26. 2023

슬기로운 금빵생활 - 하

빵 터지는 날들

그날도 업무가 바빴다. 해가 진 늦은 저녁이 되어서야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야근에 찌들어 식은 라면처럼 퉁퉁 부은 얼굴로 지하철 역을 향해 걷는데, 하루 종일 먹은 거라곤 김밥 한 줄뿐인 데다 사실은 여전히 스쿼트에 적응하지 못한 허벅지는 계단을 걸어갈 때마다 후들거리는 탓에 역 입구 손잡이를 잡고 내려 가시는 할머니 뒤에 붙어 천천히 퇴근의 굴로 들어섰다.


그런데 별안간 코 깊숙이 들어오는 갓 구운 당 입자들. 이게 뭔가 싶어 킁킁거리니 빵 냄새였다. 나는 출퇴근할 때 간단한 식사를 해결하기 위해 공덕역 신라명과를 애용했다. 그곳은 단연코 냄새 마케팅의 달인이었다. 빵 굽는 시간이면 버터와 밀가루 굽는 향기가 솔솔 풍겼고 나는 그 향기를 맡으며 유혹을 뿌리치는 법을 연습했고, 결혼식만 끝나면 맛있게 먹어줄게-하며 지나가곤 했다. 그런데 그날은 땅바닥을 툭툭 차며 걷다가 평소와 다르게 그곳 앞에 멈춰 섰다. 맛있는 냄새를 맡는 순간 화가 잔뜩 나더니, 빵 먹지 마세요-하는 PT트레이너 D의 잔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고, 순간 무엇을 입에 넣어도 죄책감을 느끼지 않을 눈빛으로 귀신에 홀리듯 매장에 들어가고 말았다.  


나는 당시 유행이던 커피번 하나만 사서 나오겠노라 다짐했다. 들뜬 마음을 감추고자 일부러 더 진지한 얼굴로 쟁반에 커피번만 담는데 마음처럼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러곤 마치 가위에 눌린 것처럼 이 빵, 저 빵 쳐다보며 매장을 떠돌기 시작했다. 저승사자 같은 손으로 러스크와 쿠키까지 골고루 싹쓸이하여 봉투에 담았고, 수북하게 쌓인 빵을 계산대에 내밀었다. 직원이 묻지 않았음에도 나는 굳이, 가족과 나눠 먹을 거라고 구매 사유를 명확히 해 두며 (다만 이 사실을 가족에게 밝히지 않았을 뿐) 양팔 가득 빵봉투를 안고 지하철을 탔다. 그렇게 집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갑자기 힘이 불끈 솟아 못다 한 업무를 하겠다고 노트북을 펼쳤고, 밤샘 노동을 위한 최소한의 섭식을 핑계로 빵을 꺼냈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책 상에 널브러진 빵봉지와 머그컵을 보며 혹시나 하는 마음에 빵봉투를 열어 보았다.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은 봉투에, 빵이 빠져나간 봉지와 가루를 쓸어 담으며 나는 어젯밤 모든 게 꿈이길 바랐다. 모든 게 그저 사고였다고, 스스로 머리를 쥐어박다가 친구들에게 문자로 이 사태를 털어놓았다. 그럴 수 있다고, 오늘부터 다시 잘하면 된다는 친구들의 위로에도 여전히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급기야 나는 예비 신부들이 모이는 다음 카페에 '빵', '폭식'을 검색했고 나와 같은 처지의 사연들을 하루 종일 읽고 나서 비로소 누구나 겪는 일이라고 스스로 마음을 추슬렀다. 죄를 뉘우치는 마음으로 다음 카페 아이디도 한동안 <호구 과자>로 바꾸었고 가족과 친구들, 사무실 동료들에게는 공식적인 금빵 선언을 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호구 과자의 금빵 선언>은 주말을 넘기지 못하고 종료되었다. 그 이유를 설명하려면, 인간의 본성을 논하지 않을 수 없다. 본래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고 환경에 취약하다. 당시 나의 환경은 유독 심각했는데 다름 아닌 같이 사는 가족들의 식사 문화였다. 종친회를 챙겨 가는 보수적인 집안답게 밥상머리 예절을 늘 강조해 왔고 예절 중의 예절은, 특별한 사정이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 아침 7시면 온 가족이 모여 앉아 아침 식사를 먹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동생은 같이 술을 먹다 막차를 놓친 친구들을 종종 자기 방에 데려와 재웠는데 새벽 두 시까지 술을 마시다 잠든 걸 알든 모르든 할머니는 아침 식사 시간이면 칼같이 깨워 콩나물 국을 한 대접 따라주었다. 한쪽 눈만 뜨고 겨우 국을 떠먹어야 식탁에서 벗어날 수 있는 주방 집권 체제는 포만감을 넘어 식구라는 책임감과 연대의식을 불어넣었고 나는 그 울타리에 사는 한, 밥상머리 문화를 수용하고 따라야 했다.  


나 홀로 금빵 선언을 하고 맞이한 첫 일요일이었다. 우리 집에는 내가 미처 소개하지 않은 독특한 일요일 루틴이 있었는데 바로 아침 특식을 먹는 것이었다. 일요일은 평소보다 조금 늦게 일어나는 유일한 날이었다. 출근을 하지 않는 날이자, 할머니가 밥을 하지 않는 날이기 때문이었다. 7시가 되면 가족들은 저마다 주방의 특정 스폿에 자리를 잡았다. 프라이팬에 버터를 칠하는 소리가 들리면 한쪽에서는 식빵을 뜯어 전달, 다른 한쪽에서는 다 구워진 식빵을 전달하는 시스템이 작동하기 시작, 엄마는 이거 창동역에서 파는 토스트랑 똑같다며 케첩을 듬뿍 넣은 빵-달걀-치즈-빵의 조합으로 접시에 담아서 1인-1 토스트를 기본 메뉴로 배급했다.

난 재빨리 해야 할 말을 외쳤다.

"오늘부터 빵을 먹지 않기로 했어요."


나는 분명하게 의사를 전달했으나 엄마는 더 가까이 토스트를 내 앞에 내밀었다. 이토록 고민되는 순간이 있을까. 이걸 먹지 않으면 엄마가 민망하지 않을까. 자식이 입안 가득 탄-단-지 조합을 오물오물거릴 때 극대화 되는 엄마의 기쁨이 사라질 텐데. 그러면 엄마는 정성스레 만든 토스트를 거절당한 기분에 마음이 상할 테지. 어느 한인 타운의 가정처럼 웨스턴 드림을 꿈꾸며 토핑을 아끼지 않은 패스트푸드를 다 같이 먹는 이 모던하고 화목한 자리에서, 저는 안 먹어요-라고 말하는 게 과연 옳은 일까. 불현듯 그런 불효를 저지를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 나는 더 거절하지 않고 토스트를 입 안에 가득 넣었다. 입술에 케첩이 묻었다며 닦아 주는 엄마의 표정은 흐뭇했다. 말없이 내 접시에 식빵을 하나 더 놓는 할머니의 움직임은 경쾌했다. 이토록 빵이 진심인 가족들이 내게 준 빵 터지는 미소에 나는 더 크게 입을 벌렸고 마음을 열었으며 금지된 빵의 문을 열었다. 더 활짝, 더 크게.

 

D에게 문자가 왔다. '주말에도 유혹에 흔들리지 마시고 식이조절을 해주시기 바랍니다." 나는 심경이 복잡해졌다. 주말에도 굳이 문자를 보내는 D의 근면함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불효는 피했으나 불경한 다이어터가 되고 말았다는 죄책감이 들었다. 아직도 고소한 버터향이 입 안에 맴돌았다. 솔직히 맛있는 게 죄는 아니지. 나는 내 안에 들어와 피가 되고 살이 (많이) 된 빵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안 먹은 척 거짓말을 하는 대신 참 교육을 받기로 결심했다.

나는 D에게 문자를 보냈다.

"사실 저 토스트 먹었습니다."

D에게 바로 답장이 왔다.

"어떤 토스트를 드신 거죠?"


나는 토스트를 보호하기 위해 자세한 언급을 피했다. 잘못한 건 나니까. 그러나 D는 꽤 집요했다. 식빵에 버터를 발랐는지, 다른 소스도 곁들였는지, 추가로 질문을 보내는 D의 문자들은 나를 재촉했고 결국 나는 한마디로 일축했다.

"엄마가 해주시는 거를 그대로 먹었어요."

D는  한참 동안 연락이 없더니 문자가 왔다.

"잘하셨어요. 결혼식 전까지 가족들과 좋은 시간 많이 보내세요."

D의 답장에 나는 그를 미워하던 마음을 내려놓았다. 나에게 일요일은 변함없이 엄마표 토스트를 먹는 날이었고 화요일에 PT를 가는 발걸음은 한결 가벼워졌다.  


나는 12주 차 PT를 완료하고 다시 평범한 점심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D의 말이 맞았다. 그가 이끈 12주의 대장정을 끝낸 나는 무사히 결혼식을 마쳤고 그날 인생에서 가장 마른 몸으로 사진을 남겼다. 일상으로 돌아가자마자 금지된 빵들도 다시 만났고 깡말랐던 기록은 자연스럽게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간혹 청첩장을 주는 지인이 결혼을 앞두고 무엇이 힘들었냐는 질문에 나는 결혼사진을 보여준다. 사진 속 젊고 말랐던 시절 (비록 매우 짧은 시절이지만)을 떠올리며 결혼보다 무서운 건 점심시간마다 절뚝거려야 했던 스쿼트의 잔재와 빵들의 유혹이었다고 말한다. 감옥보다 무서운 금빵생활을 출소한 뒤, 지금도 결혼의 축복과 진정한 해방을 누리고 있다고.

어쩌면 결혼의 행복은 그저 빵 하나에 지나지 않는지도 모른다고.

이전 06화 슬기로운 금빵생활 - 상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