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의 심미안과 통찰력으로 본 <핵심 미술 이야기>
화가의 심미안과 통찰력으로 본
<핵심 미술 이야기>
인왕산 자락에서 평생을 사신
태견 무형문회재 송덕기 옹의 증언에 의하면,
애초에 서울에서 지대가 높은
인왕산 밑쪽 마을을 '우대'라 불렀다 한다.
우대는 위에 있는 터라는 우터'의
터를 한자 '터 대(垈)' 자로 차용해서
우대가 되어 내려온 지명이다.
우터는 웃터나 윗터나 위터라고도 한다.
반대로 낮은 지역은 아래터로 부른다.
우터 > 우대(垈)
조선 시대에 서울의 명칭은 한양이었다.
궁궐을 중심으로
동서남북 대략의 마을 이름을 정했다..
서촌은 궁궐의 서쪽에 있는 마을이다.
서촌에는
세종대왕 탄생하신 곳이 있고
궁궐을 드나드는 상궁이나 내시가 살았고
북쪽으로 경치 좋은 곳엔
초기 안동 김씨 세력 등이 둥지를 틀었다.
조선 중기에는 정철의 집 터가 있고
중 후기에는 경재 정선이 살던 곳이다.
그 외에는 주로 중인들이 살았다.
일제 강점기에는 유명 소설가와 시인
그리고 화가들이 살던 곳이다.
김유정은 춘천의 재산을 처분하고
누상동에 자리를 잡았고
조선총독부 설계 일을 하던 이상과
한국적인 동양화를 그린
청전 이상범의 집터는 그대로 보존되어
지금 대중들이 관람할 수 있다.
그 외 윤동주 하숙집과 천경자 집이 있고
이중섭도 잠시 머물기도 했다.
풍수 상,
인왕산의 동쪽으로 흐르는 주맥은
가운데 봉우리 능선을 타고 내려와
날개를 펴서 감싸 안은 마을이 탄생되니,
그곳은 지금의 옥인동과
신교동과 청운동 일대이다.
그중에 가운데 주능선은
청운초등학교로 내려앉는다.
청운초교 자리가 명당 중에 명당인 것이다.
주능선의 기운이 흘러내렸다는 것은
우리 표현으로 응집된 기운을 의미하는
'심'이라고 한다.
그래서 청운초교 위쪽 능선에
'세심대'라는 큰 바위가 있다.
그 바위 이름으로 미루어 보아,
옛 우리 지명이나 바위 명칭은
풍수를 고려해 지었음을 알 수 있다.
청운초교 담을 끼고 오른쪽으로
올라가는 계곡이 있으니
청풍계 계곡이다.
청풍계 위 산과 맞닿은 끝자락에
현대건설 창업주 정주영씨 집이 있다.
정주영씨 집은 장안 최고의 풍수쟁이에게
의뢰해서 잡은 곳이다.
정주영씨 집 자리에서
백악 서쪽 면이 바로 보이는데
풍수쟁이는
그 산을 다 볏짚을 쌓놓은 것으로
보라 했다 전해진다.
풍수가 현대가의 재산 증식에
일조를 한 얘기이다.
평소 정주영 회장은 청풍계를
시원한 바람이 부는 곳이라고
자랑했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청풍계가 시원한 것은
초소책방 바로 아래서부터 동쪽으로 향한
깊은 협곡으로 형성된 지형이기 때문이다.
남쪽으로 능선으로 막혀 있고
그 바로 뒷면 그늘진 깊은 협곡에
풍부한 계천이 흐르니
서늘하지 않을 수 없는 지형인 것이다.
풍광도 수려해서 이조 중엽 때는
세도가 안동 김씨 김상용의 집터가
있던 곳이고
일제 때는 일본인 집이었고
해방 후에는 청운각이라는 요정이 있었다.
조선 중엽에는
겸재 정선이 이곳 출신으로
이 동네의 명승지를
'장동 8경첩' 그림으로 남겼다.
그 그림 첩 이름이 장동인 것은
그림에 나타나는 지역이 모두
장동에 속해 있는 곳임을 알려준다.
현재 청운초등학교 정문 바로 앞에는
송강 정철의 생가터라는 비석이 있고
그전에 그곳이 장의동으로 적혀 있다.
장동의 장을 증빙하기에 좋은
예라 하겠다.
전국을 지명 조사 해보면,
'장터', '자터', '장자터'라는 지명이 많다.
장동은 장터가 이조 시대 한양에서
동이름화 되었다.
여기서 장터는 우리가 아는 시장이 아니다.
그 옛날 장터는 정신 수련을 하던
곳으로 추정된다.
장터 > 장동
창의문(彰義門)은 조선의 수도인
한양의 4 소문(小門) 중의 하나로
서북쪽에 있는 문이다.
창의문을 위키백과에서는
"근처 계곡의 이름을 따서
자하문(紫霞門)이라고
불리기도 한다."라고 되어 있고
우리도 어려서부터 자하문으로 불렀다.
근처 계곡의 이름이 자하동이기에
자하동에 있는 문이라는 뜻이다.
자하동은 자동과 하동이 합해진 이름이고
우리말 지명 자터와 하터에서
한문 차용되고
터가 조선 시대 구역명인
'동'으로 대치되어 바뀐 지명이다.
자보다 하가 더 위쪽의 지명인 바,
실지로 자하문이 있는 터는 하동이었고
그 바로 밑이 자동이었다고 추정할 수 있겠다.
자터 + 하터 > 자동(紫洞) + 하동(霞洞)
> 자하동(紫霞洞)
겸재, 자하동, 간송미술관
위의 그림은 자하동을 그린 것으로
지금의 청운동 자하문 터널이 있는
계곡을 묘사했다.
오른쪽 산이 백악(북악산)이다.
겸재의 장동 8경은
인왕산 동쪽과 백악 서쪽 사이 지역을
아우른다.
지금의 지명으로는
청운동, 신교동, 옥인동, 통인동,
누상동, 누하동
궁정동, 효자동, 창성동,
통의동에 속한다 할 수 있겠다.
그중에서 알고 넘어가야 할 지명은
옥인동과 청운동이다.
인왕산은 인골이 있는 왕산이다.
인골 물이 맑아
옥빛과 같은 물이 흐르는 천이라 해서
옥류동 혹은 옥동이라 했었다.
1914년에 행정상 동네 이름이 만들어지면서
옥류동과 인골이 합해져 지금의 옥인동이 되었다.
옥동(옥류동) + 인곡 > 옥인동
인곡유거(仁谷幽居), 영조 31년 (1755), 겸재 정선
위 그림 제자는 '인곡유거'이다.
겸재가 말년에 이사 간
인곡의 집 풍경을 그린 것이다.
그림 속 멀리 백악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지금의 옥인동 위쪽 산동네에
위치했음을 알 수 있다.
청운동은
서늘한 기운의 계곡이라 해서
붙여진 청풍계의 청과
그 윗동네 백운동의 운이 합해져
청운동이 되었다.
일제 때 일이다.
청풍계 + 백운동 > 청운동
송덕기 옹에 의하면,
지금의 누상동과 누하동의 옛 이름은
'윗매누리'와 '아랫매누리'였다 한다.
매누리는 '매+누리'이고
'매 + 누리'는 '마이 + 누리'의 축약이다.
마이는 최고라는 뜻이고
누리는 세상이라는 우리말이다.
'세상에서 최고 경치 좋은 곳'이라는 뜻이다.
실지로 조선 때까지
한양 사랑들이 꽃놀이를 하던
경치 좋은 장소이다.
정조대왕도 그곳에 꽃놀이 갔다는
기록이 있다.
지금도 배화대학 운동장에 서면
인왕산과 북악산 남산과 관악산이
다 보이는 탁 트인 곳임을 알 수 있다.
마이(최고) 누리(세상) > 매 누리 >매누리
윗매누리가 누상동이 된 이유는
윗을 위 상(上) 자로
그리고 누를 누각 누(樓) 자로
우리말 일부를 한자로 차용해서 이다.
윗매누리 > 누상동(樓上洞)
아랫매누리 > 누하동(樓下洞)