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호사 아빠의 임출비긴스(임산부 배려석)
https://news.v.daum.net/v/20220124142125473
출근 후 첫 수술을 위한 인덕션(induction, 마취 유도)이 빠르게 끝나고 마취 기록과 주변 정리를 하고 있는데 휴대폰이 울린다.
피치 맘이다! ‘어?! 지금 출근하고 있을 시간인데....’
보통 이 시간대 오는 전화는 둘 중 하나인데 휴대폰 버튼을 잘못 눌렀거나 아니면 진짜 무슨 일이 있어서다. 더욱이 우리는 사내 커플이고 부서도 같아 시간대별 근무 상황에 대해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웬만하면 아침시간엔 통화를 하지 않는데 피치 맘에게 전화가 오니 불길한 예감에 허둥지둥 휴대폰을 들었다.
“어?! 무슨 일 있어?”
“지금 통화돼? 오빠?!”
“응 말해!”
“으앙~ 엉엉엉... 출근하려고 지하철 탔는데 세 정거장쯤 지나서 갑자기 어지럽고 호흡곤란 와서 주저앉았어”
“응?! 지금은 괜찮아?!”
“응 조금 나아졌는데 무서웠어..”
역시나 불길한 예감은 틀린 적이 없나... 울먹이는 목소리를 들으니 당장 와이프 있는 곳으로 달려가고 싶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그렇지만, 병원 각 부서에서 일하고 있는 간호사도 사적인 이유로 하던 일을 맡기고 근무지를 이탈하는 경우는 드물다.
물론 아프거나, 다쳤거나, 꼭 필요한 용무가 있을 때는 직원 안전사고 발생 매뉴얼에 따르고 또는 관리자에게 알린 후 조기퇴근, 병가, 반차 등을 사용할 수 있다.
그러나 보통은 다음 근무 간호사에게 인계를 주고서야 다른 일을 볼 수 있다. 또 일의 특성상 근무시간 동안 모든 간호중재의 책임은 담당 간호사에게 있고 거의 모든 업무가 연속선 상위에 있기 때문에 시간대별 교대자에게 인계를 주어야 퇴근이 가능하다.
만약 내가 담당업무를 못하게 되면 누군가는 일찍 출근하거나 늦게 퇴근해야 하고 쉬는 날이지만 종종 대신해서 출근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진다. 이런 이유로 어떤 심각한 일이 피치 맘에게 없는 이상 휴대폰 너머로 지금 상태를 물어보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지금은 괜찮아? 근처 병원으로 가지 그랬어?! 쭉 서서 있어서 그랬나? 자리 좀 비켜달라고 하지!” 뻔히 말이 안 되는 소리인 줄 알면서도 안타가운 마음에 와이프를 채근하며 이렇게 밖에 할 수 없는 상황이 답답하기만 했다.
아픈데 혼자서 낯선 지역의 병원을 찾는다는 것이 엄두도 나지 않았을 테고 아마도 임산부 배려석에는 임산부를 배려하지 않은 사람이 앉아 있었겠지..
이렇게 생각하니 답답하고 걱정스러운 마음은 초조함에서 분노로 변해갔다. 괜한 정치, 경제, 사회, 문화를 들먹이며 욕하고 싶고, 마음 편히 차를 가지고 다닐 수 없는 현실이 싫어지더니 자책감마저 들었다.
임신을 계획하고 이사를 하면서 사실 출퇴근 거리가 부담되고 걱정되긴 했지만 막상 이런 일이 생기고 보니 더욱 당황스러웠다.
피치 맘 같은 상황은 초기 임산부 누구에게나 올 수 있다. 아마도 처음부터 앉아서 갔다면 이런 위기가 오지 않고 무난히 넘겼을지도 모른다.
특히 임산부에게 부동의 정자세로 오랜 시간 서 있는 것은 체력적으로나 심리적으로 부담이 되기 때문에 임산부는 보호받아야 한다.
지하철 임산부 배려석은 사실 초기 임산부를 위한 자리다. 티 안나는 임산부를 위한 이 자리는 항상 비워 두어 초기 임산부들이 편히 안도록 해야 하는데 왜냐하면 임신 초기가 유산될 확률이 가장 높기 때문이다.
위기상황에 있었던 피치 맘은 임신 7주 차로, 이 시기의 아기는 머리에서 엉덩이 길이가 약 0.5~2.4cm 정도 되며, 머리와 몸통의 구분이 가능해진다. 또 뇌와 신경세포의 80% 정도가 만들어지고 심장, 간장, 위 등의 기관 분화가 시작된다. 태아의 심장 박동 소리도 확인할 수 있다(거의 6주부터 들을 수 있다).
임신 7주 차는 아기의 뇌와 여러 기관의 신경이 급속히 발달하는 시기로 아기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기간이라 할 수 있다.
한편, 엄마는 임신에 의한 호르몬의 영향으로 몸과 마음에 뚜렷한 변화를 보이며, 점점 입덧이 심해지고 빈뇨나 변비가 찾아온다. 또 임신에 의한 호르몬 불균형으로 우울감과 불안감을 느낄 수 있고 감정 통제가 힘들어지기도 하는데 이를 ‘머터니티 블루’(maternity blue)라 부른다.
머터니티 블루는 모든 임산부가 겪는 증상은 아니지만 피치 맘에게도 나타날 수 있는 감정의 변화다.
일반적으로 아기의 심장 박동이 확인되면 유산의 위험성은 크게 낮아진다. 임신 5~7주까지 유산될 확률은 10~20%이지만, 임신 7주째 이후에는 5% 이하로 낮아진다.
하지만 유산 가능성이 낮아진다고 유산의 위험성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오랜 시간 선 자세를 유지하는 일이나 지하철에서 긴 시간 서있는 것은 가능한 피해야 한다. 또 무거운 물건을 드는 일처럼 배에 부담을 주는 동작도 마찬가지다.
7주 차의 아기는 몸의 가장 중요한 기관과 신경이 발달하는 중요한 시기이며 엄마는 몸과 마음의 변화로 점점 힘들어지는 시기다. 때문에 만약 임산부가 지하철에 타면 임산부 배려석에 앉도록 하는 배려가 필요하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임산부 배려석에 대해 별 다른 생각이 없는 무관심형도 있고, 너무 진지하게 생각해 오히려 역차별 운운하는 초관심형도 있다.
또 오면 비켜주면 되지 하는 절충 타협형도 있다. 그런데 티 안나는 임산부를 어떻게 알아본다는 것인지..? 눈에 쏘노라도 달리셨단 말인지? 궁금하긴 하다.
보건소에서 배포 중인 임산부 전용 가방고리와 목걸이를 활용하는 방법도 있지만 이 임산부 배려 엠블럼은 효과가 별로다. 초기 임산부들이 보건소에서 이 목걸이를 받으며 ‘지하철 같은 곳에서 달고 있으면 자리를 양보해준다고 하더라고요’ 하는 설명을 듣지만 금세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사실 지하철엔 임산부가 앉을 수 있는 좌석이 오래전부터 운영 중이다. 노약자석(노인, 장애인, 임산부, 아픈 사람)이 바로 그 자리다. 하지만 겉으로 보기에 노인이 아닌 이상 이 자리에 앉는다는 건 상상할 수 없다. 이런저런 이유로 지하철 공사가 임산부 배려석을 별도로 만들 수밖에 없었던 속사정이 있어 보인다.
이전에도 지하철을 타면 노약자석이나 임산부 배려석은 쳐다도 안 봤지만 이번 일 이후로 지하철을 탈 때면 오히려 누가 앉아 있는지 유심히 보게 된다.
인문학 강의가 유행하던 시절 그 중심엔 <거리의 철학자, 인문학의 카운슬링>이라 불리며 소위 <강신주의> 열풍의 주인공 강신주 철학박사가 있었다.
인상 깊게 청강한 강연 중 <타인의 고통에 대한 감수성>에 대한 내용이 있는데 서로가 경쟁관계로 인식되는 냉담한 시대에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는 감수성의 중요성 관한 강연이었다.
책임이라는 뜻의 영어 responsibility는 response(반응) + ability(능력) 합성어로 ‘반응하는 능력을’ 의미하고 반응하기 위해선 느껴야 하고 느끼지 않으면 반응할 수 없으며, 느끼지 못함에도 반응하는 척하는 것은 위선임을 박사는 말했다.
임산부의 고통에 대한 우리의 감수성은 어떨까? 느끼지 못하니 자리를 비워두지도 내주지도 않는다. 때론 느끼지 못해도 좋으니 자리를 내어주는 위선이라도 있었으면 할 때가 있다.
정치가 타게 프리티 오프 에를란데르(Tage Fritiof Erlander)는 “현대 정치인 가운데 가장 뛰어난 사람이 누구냐? “는 질문에 스웨덴 국민이 주저 없이 답하는 인물이다.
그는 스웨덴의 보편복지를 완성한 총리로 23년간 장기집권 했는데 독재가 아닌 11번의 당선으로 가능한 기간이었다.
스웨덴의 국민 아버지로 불리는 타게 에를란데르는 ‘나는 돈보다 사람을 믿는다’는 말과 함께 아이를 돌봐야 하는 여성, 몸이 불편한 사람들, 고등교육을 받지 못한 노동자들 편에서 그들에게 동등한 기회를 주고자 했다.
그리하여 ‘모든 아이는 모두의 아이’라는 슬로건 아래 실시한 아동수당 연금, ‘환자에서 시민으로’ 전 국민 무상의료보험, ‘언제라도 다시 시작할 수 있는 배움’ 초등학교에서 대학원 박사과정까지 무상교육, ‘삶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집’ 주택수당법까지 육아, 의료, 교육, 주거에 관한 정책을 폈고, ‘이런 문제가 사람들의 발목을 잡지 않아야 한 개인이, 한 나라가 최대한 성장할 수 있다’는 정치 신념을 고수했다.
이런 정책들은 목요 클럽(thursday club)이란 명칭의 노사정 합의(노동자, 사용자, 정부)를 매주 목요일, 23년 동안 열어 얻은 결실이었다. 또 합의에 이르는 모든 과정을 국민에게 공개하며 국민 모두를 상대로 한 수십 년의 설득 끝에 스웨덴은 세계에서 가장 많은 세금을 내는 나라가 되었고 국민들은 자발적으로 지갑을 열었다.
내 아이만 바라보던 눈을 모든 아이들에게 돌렸을 때 육아정책의 변화가 시작된 것이다.
타인의 고통에 대한 감수성이 떨어진 시대에 살고 있는 임산부들.. 모든 아이가 한 번도 모두의 아이가 되어 본 적 없는 아이들.. 모두가 원하는 변화가 필요한 시점이라 생각한다.
타인의 고통에 대한 감수성은 나와 당신을 돕고, 살리고, 유지시킨다. 모든 아이가 모두의 아이가 될 때 임산부를 위한 배려심과 관심, 아이들의 안전도 보장받을 수 있다.
친구와 대화 중 시월드 이야기가 나왔다.
“우리 시어머니가 자기를 친구처럼 대하지 말래.. 우리 시어머니는 나를 그저 며느리 역할로만 봐! 난 어머니와 진정한 인간관계를 가지고 싶은데 말이지..”
우리가 매일같이 만나는 사람들.. 가정에서 직장에서 지하철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역할로서만 존재하지 않는다. 마치 기계 부속품처럼 역할로서만 사람을 본다면 우리는 상대방이 가진 그 어떤 개성도 장점도 강점도 찾을 수 없다.
머릿속 잣대로 역할에 맞게 행동하는지, 기능은 잘하는지를 점수화하고 그에 따라 사람을 대하고 구분 짓게 되면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 본인도 그렇게 경계했던 편견과 선입견을 가지게 된다.
또 어느 때는 기준에 못 미치면 화가 나 자신도 모르게 언어폭력을 사용할 때도 있고 오히려 그 폭력의 희생량이 되기도 한다.
이런 대우와 폭력에 무방비로 노출된 사람은 결국 극단적인 결정을 하게 되는데 그곳이 회사라면 ‘그만두는 길이 살길이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하며 이직을 결심하고 때론 과격한 물리적 복수를 꿈꾼다.
다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우리는 결코 이런 방식으로 사람을 대해선 안 된다.
함께 살아가는 세상엔 겉모습은 분명 사람인데 언행을 보면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 그렇다고 우리도 그들을 역할로서만 보면 안 된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우리는 우리 마음 한편에 배려석 한자리쯤 비워 두어야 한다. 그것은 마치 임산부 배려석을 비워두는 것과 비슷하다.
우리는 상대방을 알지 못한다 사실 알고 싶지 않을지도 모른다, 관심을 가지면 내 시간을 할애해야 하고 돈도 들고 피곤해 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 마음에, 생각에, 시간에 임산부 배려석 한 군데 비워 놓으면 그 자리에 도움이 필요한 누군가는 앉아서 쉼을 얻고, 피치 맘 같은 위기상황을 넘기며, 어떤 이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지 않고 다시 한번 기회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세상 사람 모두를 역할로만 보지 말자! 엄마도 아빠도 내 직장 올드 샘도 신규 샘도 관리자도 그 역할에 충실하고 싶지 않은 사람은 없다.
‘세상을 몰라서 그래! 험한 세상 살아가려면 빈틈을 보이면 안 돼!’ 라고 말할지 모르지만 (사실 그게 편하긴 하다) 그런 세상도 사회도 자기도 모르게 배려받은 사람이 만든 곳이다.
누구도 혼자 잘나서 지금의 자리에 있는 사람은 없다. 최근 드라마에서 “외면하지 말고 도와주는 멋진 사람이 되자”란 대사가 기억에 남는데 임산부를 외면 말고 도와주는 멋진 사람이 되어보는 건 어떨까?
지하철 안이라면 주위 임산부에게 자리를 양보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