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내 인생에 어느 날 갑자기 허리케인 급의 ‘쓰나미’가 몰려온 후부터 나는 자진해서 영화 속 주인공이 되었다.사람의 한계를 시험하는 아픔이자 도저히 현실로 받아들일 수 없는 현실이었다. 극한 고통의 세계에서 내가 택한 생존방식은 ‘회피’였다.
‘이건 가상이야. 현실이 아니야.
나는 지금 영화를 찍고 있는 거야.
내가 느끼는 이 통증은 가짜야.’
내 몸과 내 존재를 분리하기를 선택했다. 그것이 내가 미치지 않고 정신을 붙들 수 있는 방법이었다. 외면하고 눈을 감아 부인했다. 뇌는 진짜와 가짜를 구분하지 못 한다기에 뇌에다 계속 자기암시를 걸었다. 그렇게라도 살아야 했고 살아남아야 했다. 이렇듯 ‘회피’도 때로는 삶의 방식이 될 수 있다.
꽤 긴 인고의 세월이 흘러서야 ‘쓰나미’의 흔적들을 마주볼 여유가 생겼다. 중환자실에서 깨어나 마치 오랫동안 멈춰있던 의식이 돌아오는 것과 비슷한 의학적 증상을 겪으면서부터, ‘시간을 뛰어넘은 자, 기억을 편집한 자’의 경험이 허락되었다. 그 때부터 나는 ‘회피’가 아닌 ‘정면 돌파’를 조금씩 연습하기 시작하였다.
‘이 모든 건 꿈이 아니야. 그건 너에게 실제로 일어났던 일이고, 이 모든 건 네가 겪고 있는 너의 인생이야.’
라고 내 자신에게 말해주었다.
그렇게 내가 겪은 고통들을 마주보고 기승전결 되짚어 봄으로 내 인생을 있는 그대로 존중해주기로 했다. 흔히들 과거는 허상이며 과거를 돌아보는 것은 헛된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때론 과거에 대한 예의도 필요한 법이다. 과거들이 층층이 쌓여 만들어 낸 화석이 현재이기 때문이다.
멀쩡한 의식으로 깨어 있을 수 있고, 쫙 펴진 척추로 걸을 수 있기만을 바랐던 때가 있었다. 사람들과 ‘연락’이란 걸 할 수 있고, 거기다 사람의 ‘눈’을 보고 ‘대화’란 걸 이어나갈 수 있으면, 그렇게 되면, 뭐든지 다 할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사람같이 산다.’는 것은 그게 다가 아니었다. 그저 걸음마일 뿐이었다.
“네가 이제야 다른 사람들처럼 살 수 있는 힘이 생겼구나.”
라고 누군가 내게 말했다.
그런 힘이 생겼다는 건, 죽어가다 살아났으며 사람이 되어 가고 있다는 증거였다. 거기에 만족이 안 되고 이제부터라도 더 사람같이 살고 싶은 욕망이 샘솟는다. ‘살아있음에 감사’하며 ‘하루하루 연명’하는 거 말고, ‘하루를 하루같이’ 살 수 있는 삶에 대한 욕망 말이다. 몸에 갇혀서 시간을 흘려보냈던 세월이 길었기에 나는 인간의 욕망을 초월했다고 착각했던 순간이 있었다. 하지만 몸이 회복되고 나니, 그저 육체의 감옥에 압박받아 짓눌려 있었던 거였다는 생각이 든다.
내 선호, 내 의견, 내 욕심, 내 가치, 내 감정… 이런 것들을 발휘할 일말의 기력도 없었기에 두 손 두 발 다 들었을 뿐이었는지도 모른다. 잃어버린 시간들 앞에서 사고 전의 나도 그 때 그 사람들도 되찾을 수 없다는 것이 슬프다 못해 억장이 무너지기도 한다. 이 속에서 내가 취할 수 있는 것은, ‘본래의 나’로서 내 인생의 남은 시간들을 밀도 있게 살아가는 것이다. 그것을 위해 나는 오늘도 한 걸음씩 나아가고 있다.
나의 투병기와 재활기가 극한의 감옥에 갇혀 있는 이들에게 위로가 되길 바라고, 아픈 가족들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보며 고통의 짐을 함께 짊어지고 있는 이 땅의 누군가에게 격려가 되기를 바라며 이 글을 쓴다.
그대도 이겨낼 수 있고 살아갈 수 있다.
내가 살아왔고 살아있기 때문이다.
그대는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매우 가치 있고 소중한 존재이다.
그러하기에,
삶을 포기하고 싶을 정도로 그대가 처한 인생이 밑바닥이라고 느껴도,
더 이상 더 밀릴 수 없을 정도로 벼랑 끝에 몰려도,
그대는 살아있어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