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와 연락하고 싶은 본능을 누르고 눌렀다. 그런데 이미 도움을 받는 것의 힘을 맛보고 난 후라 더는 혼자서 치료의 고통스러움을 견딜 자신이 없었다. 꼭 사랑을 주고받는 대상이 아니어도 타인의 부축과 관심이 필요했다. 치료를 포기하고 집에서 누워 지내거나 삶을 포기하여 죽는 것 보다는 낫다는 심정으로, 나를 응원해주고 건강 회복을 도와줄 사람이 있다면 바지 끝자락을 붙잡고 싶었다.
그 사람들이 누구인지 신께 물었다. 그 사람들을 보여 달라고 신께 간청했다. 그렇게 나는 타인을 의지하기 시작했다. 어린 시절부터 애어른으로 과하게 혼자서 모든 짐을 짊어지며 살아왔다면, 20대의 끝자락에서 나는 되려 20대 초반의 자아로 말하고 행동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다 큰 어른의 그런 모습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어른은 드물었다. 다 큰 성인이 나이에 안 맞는 어린 모습을 보이는데 정상적이고 건강한 삶을 살아온 이들의 눈에 그것이 얼마나 거북함을 불러일으켰을까?
당사자인 나는 신체적 나이만 성인일 뿐 두뇌상태는 아기처럼 전조작기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을 체험하고 있었지만 그 희귀한 의학적 상태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렇지만 오해받고 비난받더라도 최대한 빨리 건강을 회복해가는 것이 모두를 돕는 것이라고 판단했고, 나는 큰 용기를 내어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다가가 문을 두드렸다. 어느덧 삼십대 중반을 바라보는 지금의 나는 거듭된 실패를 통해 ‘나를 지탱할 사람은 오직 나’라는 것을 배웠고 단단해 졌지만 삼십대 초반의 나에게는 타인의 부축을 받는 과정이 필요했다.
그 경험들을 통해 사람과 사람의 관계란, 기억을 기반으로 한다는 것을 보게 되었다. 사랑 또한 마찬가지다. 남녀가 그 순간 마음이 통한다고 해서 다가 아닐 것이다. 서로의 시간 안에서 마음이 만나야 하고, 각자의 시간이 흐름에 따라 마음이 어떤 형태로든 변화할 것이다. 그 변화의 흐름에서 마음이 지켜져야 처음과 같은 관계가 지켜질 수 있고, 무엇보다 기억과 기억이 맞닿아야 한 방향에서 만날 수 있다.
극히 드물게 나처럼 기억을 잃어버림으로 기억과 기억이 어긋나 버리면 동시대에 같은 마음이었어도 이어질 수가 없다. 그래서 ‘사랑은 타이밍’이라는 말이 있는가보다.
내 무의식이 기억한 사랑
교통사고 당시 내 머릿속을 온통 꽉 채우고 있었던 존재
안개가 낀 내 두뇌가 살아나도록 도와준 사람
너무나 늦게 깨달아버린 나의 첫 사랑
이어질 수 없는 평행선
카이로스와 크로노스의 장난 앞에서
절대자의 주권 앞에 무릎 꿇을 수밖에 없는 이야기
모든 걸 인정하고 받아들이기가 가슴이 갈기갈기 찢기듯 아팠지만 나를 다시 세상 밖으로 끄집어 내주고 세상을 향해 설 수 있도록 일으켜준 그에게 감사하다.
나는 늘 나의 감정을 회피하고 부인하며 살았었다. 타고나길 감수성이 풍부한지라 이런 나를 절제하고 싶기도 했고, 인간관계에서 사람이 자신의 감정을 컨트롤 못 해 상대가 기분이 상하고 관계에 금이 가는 게 너무 싫기도 했다. 화평주의인 나는 내 감정을 꾹 눌러서라도 '최대다수 최대평화'를 지향했다. 그런데 누군가를 해하지 않는 감정의 영역에서 스스로 내 감정을 인정하지 않고 말하면 마음과 일치하는 말을 하지 못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핵심이 빠진 의도하지 않는 말들만 늘어놓게 되고 말하는 나도 시원하지가 않았다. 내가 내 감정을 인지하지 못 하고 말을 하니 낱말들을 나열하는 장황한 표현이 되어버리곤 했다. ‘아무말대잔치’가 되어버리는 것이었다.
‘감정을 감정답게’
나는 그것을 연습해 나갈 필요가 있었다. 감정을 감정이 존재하는 이유와 목적대로 대해줘야 하는데 나는 그것을 잘하지 못하고 살아왔다. 감정의 회피는 좋은 해결책이 아니고 해소되지 않은 채 덮어버린 감정은 언젠가 드러나 있게 되어 있다는 것을, 그와의 에피소드를 통해 배웠다. 감정 자체를 가질 수 없을 정도로 아파보았던 내 경험에 비추어 볼 때 감정의 존재는 아주 소중한 것이다. 따라서 부담스럽고 부정적인 감정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그러한 감정들도 다 존재하는 이유가 있으니 그에 걸맞게 대우해줘야 한다.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이 순간 당신의 무의식을 마주해 보세요. 혹시 놓치고 있는 감정이 있지는 않나요? 자신의 감정을 자신이 가장 잘 알아야 한답니다.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자신의 마음을 한 번 들여다보세요. 삶의 압박에 눌려서 당신의 가장 큰 사랑의 대상을 못 알아보고 있지는 않은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