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에서 비행기가 슝
서른 봄의 어느 날, 침구사 할아버지 치료를 받고 기운 없이 누워 있던 나의 머릿속에서 해마가 꿈틀거리더니 기억의 비행기가 지나갔다. 사고 후로 오랫동안 멈춰있다시피 했던 뇌세포가 살아나기 시작한 느낌이었다. 제 기능을 하기 시작한 해마는 그와의 첫 만남부터 마지막 통화까지의 기억들을 영화 필름이 몇 배속으로 감기는 속도로 끄집어내었다.
10여년 만에 돌아온 그를 향한 사랑의 기억은 내 온 존재를 사시나무 떨듯이 떨게 만들었다. 충격으로 인해 다리가 후들거리고, 숨이 벅차오르고, 하염없이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기억의 파편들을 따라 묵혀두었던 그의 편지를 찾아보았다. 놀랍게도 편지를 보관해두는 상자함 깊은 곳에 그의 편지는 그대로 있었다. 시간은 10년이 흘렀는데, 편지는 멈춰있었다.
교통사고 후로 물건들을 정리할 여력도 없이 통증에 시달리며 하루살이로 살아왔으니 편지가 없어지지 않은 것이 당연한 것이었지만, 그것을 간직하고 있었으면서도 간직하고 있다는 그 사실조차 잊고 살았었다는 사실이 날 서글프게 만들었다. 그의 진한 마음이 담긴 빼곡한 글씨들 앞에서 또다시 뜨거운 눈물이 흘렀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 거지?
나는 왜 그의 마음을 잊고 산거지?
어째서 이제야 기억이 다 돌아온 거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이 모든 것들이 나의 망상이 아니며 사실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싶었다. 기억이 재생되면서 떠오른 그의 전화번호 11자리를 눌러보았다. 과거 그의 개인적인 번호였던 그것은, 그의 사무실 연락처가 되어 있었다. 나의 신원과 연락처를 남기고 연락을 기다린다는 메모를 남겼다.
확인하고 싶었다, 이 모든 기억의 사실여부를.
직접 듣고 싶었다, 과거 그의 마음을.
그리고 붙잡고 싶었다, 앞으로 살아가기 위한 원동력으로 그의 존재를.
그의 연락을 기다리는 동안 과거 그로부터 받았던 글들을 읽고 또 읽었다. 글마다 진하고 깊은 사랑이 담겨 있었다. 글자 하나하나에서 전해져 오는 그의 깊은 진심에 이 짓궂은 운명의 장난을 원망했다. 이 기억이 빨리 돌아왔더라면 그에게 연락을 하지 않고는 못 배겼을 것이고, 나의 모든 고통이 빨리 끝났을 수도 있으며, 늦지 않은 시기에 그와 이어질 수도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야속하게도 교통사고 후유증은 나에게 ‘부분기억상실증’을 선물해 주었고, 그가 나를 사랑했다는 사실조차 잊고 살게끔 만들어 버렸다.
어떻게 이렇게 크고도 강렬한 기억을 잃어버릴 수 있었단 말인가?
운명의 장난 앞에 가슴이 찢겨져 내렸다.
왜 하필 이제야 기억이 돌아왔단 말인가!
운명의 방해 앞에 마음이 무너져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