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여섯, 꿈꾸던 ‘커리어 우먼’은 어디로 갔는가

'위축'은 여러 순간 찾아오는데 지금은 '커리어 우먼'단어에 위축된다.

by 제니
"가장 절망적인 것은 자기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으로 사는 것이다.”

_by 키에르케고르
KakaoTalk_20180508_141038847.jpg ▷'이미지 출처'_by book <우리 삶이 춤이 된다면> 中


대한민국에서 이런 프로젝트를 시작할 수 있게 옆에서 도와준 많은 분들 덕분에 나는 '변화되는 내 모습'을 기록으로 남기려고 한다.

그간 ‘착한 00 딸, 00 아내, 00 엄마’로서 하지 못했던 것들을 한 번쯤은 ‘자유롭게’ 하며 억압된 무의식에 ‘자율성’을 되찾고 싶었다.

그런 '기대'와 '자신감'으로 이 프로젝트를 시작한다.

이것은 실패로 끝날 수도 있고 무의미한 도전이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실패 또한 값진 ‘삶의 지혜’가 될 것을 분명히 알기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지만 한 발을 내딛는다.




쉬고 싶다는 내면의 STOP 사인


처음 ‘일’이란 걸 경험해 본 건 중학교 1학년 때였다. 부모님 몰래 용돈 벌이로 친구들 7명과 신설동에서 찹쌀떡 판매 아르바이트를 하루 경험했다. 이후에도 평일 하교 후 독서실 간다며 석계역 부근 아파트에서 녹즙 전단지 아르바이트를 했다. 고등학교 때는 부모님 몰래 방학 때 유럽에 수출하는 산소 페트병 공장에서 병 포장 아르바이트를 두어 달 했고 고3 수능시험을 본 이후로는 추운 겨울 새벽에 일어나 4시간씩 걸어서 차량에 붙이는 자동차 대출 전단지 아르바이트를 했다.


당시 전단지를 붙이다 경찰한테 걸리기도 했다. 이 경우 경범죄로 벌금 3~5만 원 내는 즉결심판을 간다고 했는데 내가 불쌍해 보였는지 경찰 아저씨는 이렇게 말했다.


“학생, 걸리지 않게 조심해서 붙여.”


재미있는 게 이때 수유역에서 모이면 봉고차 한 대가 와서 우리를 태우고 목적지로 향했다. 미아리에서 창동, 당고개까지 이어지는 구역 내 대단지 아파트가 목적지였는데, 매일 다른 곳에 우리 일행을 내려주면, 우리는 내린 곳부터 걸어서 자동차 유리창문에 대출 전단지를 붙이고 걸으면서 4시간씩 이동했다.


당시 대학 입학을 앞두고 다이어트도 하고 돈도 벌 겸 긍정마인드로 일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참 짠하다. 시급이 아마도 5천 원 이었던 것 같은데 그 추운 겨울 새벽에 일어나서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대단지 자동차 유리창에 붙인 생각을 하면 웃음이 나온다. 가끔 경쟁업체 대출 전단지 알바랑 마주칠 때도 있었는데 그럴 때면 숨었다가 상대가 붙인 걸 떼고 다시 붙이기도 했다.


생각해보니 더 무서웠던 건 경쟁사 관리 직원이다. 조폭같이 생긴 직원들이 가끔씩 전단지 대출 알바가 버리지 않고 일을 잘하나 감시 & 점검차 오는데 가끔씩 구역이 겹칠 때면 내가 붙이고 있는 곳에 경쟁사 담당자가 얼굴을 들이밀고 무서운 얼굴로 노려보곤 했다. 처음 시작 때는 사지가 떨리고 너무 무서워서 아무 말 못 하고 뛰거나, 죄송하다고 말했다. 시간이 지나 조금씩 노련해지니 경쟁사 직원이 너 뭐하냐고 으름장을 놓아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이렇게 말했다.


“저도 먹고살아야죠.”

그 후 대학교 입학 전 바짝 돈을 벌기 위해 논현동 유명 설렁탕 집에서 야간 서빙 알바를 두어 달 한 기억도 있다. 대학교 진학 이후에는 구청 사무직 아르바이트, 방학 때면 짭짤했던 은행에서 휴대폰 판매 아르바이트, 취업 전 잠시 했던 과외까지…


2008년 첫 취업을 기점으로 네 곳의 회사에 다니고 휴직 포함, 합산 10년 정도 일하다 보니, 나는 이제 좀 쉬고 싶어 졌다. 나의 내면은 계속해서 'Stop'이라는 메시지를 수시로 던졌다.




알아서 척척척 스스로 어린이


학생이 공부해야지 왜 알바를 했냐고 묻는다면 ‘돈’ 때문이었다. 내 기억으론 초등학교 3학년 전까지, 그러니까 6살 이후 기억으로 하계동 아파트 단지로 이사 갔을 때는 괜찮았다. 강남 대형 아파트는 아니었지만, 그 당시 아파트에 살던 시절에는 빵은 제과점에서만 먹고 재래시장을 가본 기억이 없다. 유해시설이 없기에 오락실 등은 갈 기회도 없었고 단지 내 상가에서 학원 다니고 밥 먹었던 기억이 있다.


그러던 중 아빠의 비전이 바뀌면서 초등학교 3학년 때 이사 간 뒤부터 많은 것들이 달라졌다. 아파트에서 살던 나는 반 지하 방으로 이사했고 피아노 등은 팔아야 했다. 이유도 모른 채 이사와 전학을 가야 했고 이사한 뒤 나는 제과점 빵보다 슈퍼 빵을 먹고, 시장 내 떡볶이를 먹고 오락실에 오빠를 찾으러 매일같이 발 도장을 찍었다. (스트리트 파이터가 한창 유행이던 당시, 엄마는 늘 날 오빠 잡으러 오라며 오락실로 보내곤 했다. 100원 넣고도 왕까지 가는 오빠를 기다리느라 지루해 100원 넣고 비행기 게임을 시작하면 30초도 안 돼 죽고 말았다.)


백화점 브랜드 원피스를 입던 나는 어느새 시장 똘마니가 되어 있었다. 특히 연년생 오빠의 영향은 어마어마했다. 피구왕 통키가 유행할 때는 한 손으로 불꽃 슛을 쏠 때까지 피나게 연습해야 했고, 축구왕 슛돌이가 나올 때면 발에 불이 나게 축구를 해야 했다. 나의 남성성은 아마도 이때 개발이 되지 않았을까 한다.


중학교 2학년 때 난생처음 ‘부천’이란 곳으로 이사와 전학을 가게 됐고 거기서 또 낯선 풍경을 접했다. 당시 서울은 뺑뺑이라 크게 공부를 안 했는데, 전학 가자마자 중학교 연합고사 시험을 준비한다며 늦게까지 야자(야간 자율학습)를 했다. 내가 이사한 지역은 당시 부천에서도 가장 저렴한 곳이라 환경이 그렇게 좋지 않았다. 왜 이사 간 학교에는 복학생이 있는지 그땐 잘 몰랐다.


그 시절부터 부모님은 일에 바쁘고, 일이 크게 잘 안 되었기에 나는 ‘알아서 척척척 스스로 어린이’로 자랄 수밖에 없었다. 부모님 속 썩이지 않게 내 일은 알아서 하고, 말 잘 듣는 착한 딸이 되기로 마음속으로 결심했다.


누가 등 떠밀어 그런 생각을 한 건 아니지만, 그 당시의 환경은 나 자신을 스스로 그렇게 만들었다. 아마도 둘째로서 오빠보다 큰 관심을 받지 못한 나로서 그런 방법으로 부모님의 환심을 사려고 했을지도 모른다.




커리어 우먼을 꿈꾸다 집으로 들어가다


정확한 시점은 기억이 안 나지만 어느 순간부터 나는 ‘성공’하고 싶었다. 불굴의 의지로 열악한 환경을 극복한 신문지면의 주인공이 되고 싶었다. 그것이 나도 출세하는 길이고 어깨가 축 처진 부모님을 위한 길이라고 생각했다. 일이 잘될 때는 지나가는 이웃들도 반갑게 인사하는데 일이 잘 안 풀리니 집에 자주 찾아오던 친척들의 발길도 끊겼다. 아마 어린 나는 그런 여러 분위기를 감지했던 것 같다.


중학교 3학년 즈음부터 신문을 정독했고, 원하는 대학에 들어가 ‘기자’가 되기로 다짐했다. 왜 ‘기자’가 되기로 했는가, 그것도 돌이켜보면 의문이다. 물론 어려서부터 일기 쓰기, 글쓰기를 좋아했던 건 맞다. 고등학교 장래희망 쓰는 곳에 ‘기자’라고 쓴 것도 맞다. 근데 이게 내 자발적 의지인지 아니면 얼핏 기억나는 “네가 기자가 돼 오빠를 더 빛내주면 좋겠다.”라는 부모님의 영향인지는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대학교 3학년까지 고군분투하며 학점관리, 스펙관리, 대학생 마케터 & 명예 기자 활동 & 어학연수 & 신문사 사회부 알바까지 차근차근 걸어갔으나, 휴학 후 6개월 다녀온 ‘뉴질랜드’ 경험 이후 모든 것이 달라졌다.


‘우물 안 개구리’를 모르고 처음 접한 뉴질랜드의 자원, 여유로움, 그렇게 분주하고 치열하게 살지 않는 사람들, 그저 평범한 일상, 이런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내가 거주했던 지역이 ‘시골’이라 그랬을 텐데 ‘뉴질랜드의 전체 이미지’는 내가 경험한 그것으로 직결됐다. 한국으로 돌아온 뒤 4학년으로 복학 후 나는 방황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10 ~11년을 삽질하다 나는 지금 글을 쓰고 있다.



서른여섯, 대단히 멋진 커리어우먼으로 뭐라도 되어 있을 것 같은 내 상상은 잔인하게 무너졌고 5세 아들과 씨름하며 하루하루 소일거리 하고 일희일비하는 평범한 엄마의 삶을 선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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